퇴근.
오래간만에 차선을 잡았다. 요즈음 말차 가격이 폭등하여 좋은 말차 얻기가 힘들다. 차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외부에 공개를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다회(茶會)를 하게 돼서 주변에 알려졌다.
내 취미 생활 중 가장 은밀했던 것이 바로 말차다. 말차는 원래 중국의 당나라 시절 녹차를 마시던 문화에서 유래하는데, 당시엔 녹차를 유통하기 위해 단단한 형태로 굳혔고 차를 마실 때는 그때그때 조각을 내서 찻물에 넣고 우렸다. 그러나 찻잎은 뜨거운 물속에서 색이 갈변하므로 가루를 물에 개서 마시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말차이다.
뜻밖에 엽차(葉茶) 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엽차는 명나라 시대가 되어서야 나타난 양식이다. 명나라의 홍무제가 1391년 9월에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칙령을 내려 당시 공물로 진상하던 용단차(龍團茶) 제조를 금지하는데, 이 용단차는 점다법으로 우리는 일종의 말차였던지라 점다법 또한 금지한다. 그 대신 추천한 방식이 바로 지금의 엽차와 같은 포다법이다.
녹차가루와 말차는 서로 다르다.
말차는 약 3~4주간 차광재배(햇빛 차단)를 거친다. 녹차는 햇빛을 받으면 예전에 생성해 둔 아미노산(페닐알라닌 등)을 사용해 카테킨을 만든다. 또한 차광으로 부족한 일조량 하에서 광합성을 하고자 녹차는 클로로필(엽록소) 함량을 대폭 늘린다. 카페인이나 L-테아닌 등도 크게 늘어난다. 반면 폴리페놀의 함량 변동은 다소 복잡한 결과가 나온다. EGCG 등 일부 카테킨 함량은 차광시 오히려 증가하지만, 고분자 탄닌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즉 녹차가루와 말차의 차이는 아미노산(L-테아닌 등)+엽록소+카페인+일부 카테킨 vs 고분자 탄닌 중 무엇을 더 많이 섭취할지의 문제로 보인다. 페놀성 화합물 총량은 녹차가루가 더 높다는 연구가 많지만 서로 함량에 차이가 없다는 논문도 있어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심신 안정과 뇌기능 회복, 독소 제거와 다이어트 등 테아닌과 엽록소의 효능이 계속 주장되면서 녹차와 말차를 상이한 차로 구분하는 일이 늘고 있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심신 진정효과(테아닌)가 있는 말차가 더 잘 맞을 수도 있다.
우리의 말차와 일본의 말차는 다르다. 차 나무의 종류나 특성도 다를뿐더러 제다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일단 맛이 다르다.
말차에는 농차(濃茶)와 박차(薄茶)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요리용이 아닌 말차용으로 판매하는 녹차가루는 박차일 가능성이 높다.
말차의 재료는 우전급 찻잎을 차광재배한 것을 쓰는데 그중에서 차나무의 수령이 일반적으로 60년~100년 이상 된 나무에서 난 것들은 상품으로 치며 이것들은 대체로 잎이 매우 부드럽고 생잎 특유의 풋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잎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농차이며 재료가 귀한 만큼 제작도 전문가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장 저렴한 제품도 10만원 이상에서 거래된다.
보통 고급 다회에서 사용하는 차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농차의 차 이름에는 옛 석(昔)자가 들어가거나 자연물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차의 색도 진하고 격불을 하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는 이름과도 관련있는데, 진하게 마셔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농차는 거품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떤 다회에서는 격불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박차는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로 일반적으로 연습을 하거나 혹은 간소한 다회를 할 때 상당히 좋은 박차인 경우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박차는 농차에 비해 다루기도 쉬우며, 유화도 대개 잘 나는 편이고 맛도 대개는 무난한 편에 속한다. 농차든 박차든 장인이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호기심으로 돈을 잔뜩 써서 마셨다가 돈 아까워하는 경우도 많다.
처음 녹차를 시작한다면 요리용만 피하면 좀 저렴해도 맛이 이상하지 않으니 박차부터 마시는 쪽을 추천한다. 농차의 문제는, 위의 설명만 들으면 무조건 맛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박차보다 맛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다루기가 무척 어렵다. 이는 완의 선택, 물의 온도, 격불의 방법, 차선의 선택에 따라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문화의 중심이 되는 차가 말차이다. 일본으로 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한국의 삼국시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과 일본의 승려였던 이세이가 송나라에서 유학을 하면서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이 당시의 차는 동의보감에서도 나오듯이 몸에서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약재로도 여겼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홍삼 먹듯이 차를 마셨다고 한다.
이후 승려들 사이에서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단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마시는 다선의식(이것은 우리나라에도 지금까지 존재한다) 역시 승려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선생이었던 센노 리큐 대에 이르러서야 현재 말하는 일본식 다도라는 형태로 정착이 된다. 이 때의 차 역시 당/송대의 녹차 가루를 내는데서 유래했기 때문에 전체 의식은 가루를 만들고 갈아서 차를 타는데까지 전과정이 다 포함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차는 일본식 다도의 뼈대를 이루게 된다.(잎으로 된 찻잎을 우려마시는 것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방식이다.) 따라서 말차는 일본식 다도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한국,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말차가 사치스럽단 인식이 없었기에 맥이 끊기지 않고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온 것이다.
센노 리큐 대 이후로는 그의 아들들이 각각 자신의 분파를 만들고 스승에게 호를 얻어 현재에 와서는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다도의 계보도만 해도 십수가지가 이르는데 모두 자기네 다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차가 있고 격불을 하거나 다회를 수행하는 방법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나는데, 어떤 다회의 경우(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격불을 해서 유화를 내지 않기도 한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분파로는 리큐의 손자들이 일군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테센케(表千家), 무샤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 등의 분파로 각각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해외에서는 우라센케의 다도회가 가장 잘 알려져있고 활동도 왕성한 편이다.
차시로 말차잔에 두어 숟가락 덜고, 더운물을 부어 차선(茶筅)으로 거품이 일도록 저어 마신다. 이때 거품을 유화라고 일컫는데, 유화를 내겠다고 미친 듯이 젓다가 차의 맛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적당한 시간 10-12초 사이가 적당한데, 고급 말차일수록 격불을 많이 하면 차맛이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말차를 마실 때 유화를 내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녹차의 카테킨 성분이 거품이 되어서 특유의 떫은맛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화를 적절히 잘 낸 말차는 떫은맛이 덜어지고 감칠맛이 더 풍부하게 느껴진다. 즉, 훌륭하게 유화를 낸 말차는 그만큼 맛도 좋아진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보여지는 차완 가득히 유화가 올라와있는 것은 우라센케의 경우이고 오모테센케의 경우 차완을 위에서 들여다봤을시 유화는 많아도 40% 보통 30% 미만으로 유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렇듯 유파마다 유화의 양도 차이가 있으며 유화가 없는 것이 점주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아닌 점을 유의하자.
보편적으로 유화가 있어야 맛이 더 좋은 경우가 많지만, 유화도 사람을 꽤 타기 때문에 유파를 벗어나서 취향의 문제로 유화의 양을 줄이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보통 많이 쓰이는 말차는 유화가 있는게 맛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말차의 경우 굳이 유화를 낼 필요도 없으며 유화 없이 마시는 것이 더 맛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대로 유화를 많이 내면 안되는 유파에서도 유화가 맛있다고 느끼는 다인은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나 선생님 앞에서는 작법대로 만들되 집에서나 아는 지인들끼리 모일 때는 유화를 가득 올려서 즐기는 경우도 있다.
일본 말차의 경우 다원마다 특색이 뚜렷한 편이라 비슷한 등급의 말차라고 하더라도 맛의 차이가 있는 편이다. 가능하면 여러 다원의 다양한 말차를 시도해보고 말차의 양과 물의 온도, 유화의 양도 조절해보면서 자신만의 말차를 찾아보자. 일본에서 파는 유명한 브랜드인 경우는 대개 장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명 브랜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홍차나 녹차를 대량유통시키는 대형 식음료 브랜드가 아니라 에도시대 혹은 막부시대부터 다원을 운영하면서 귀족들에게 진상했던 경험도 있는 고급 중소 다원을 말한다. 해당 유파를 위해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보통 차의 이름 옆에는 해당 유파의 이름이 차의 명칭과 같이 길다랗게 쓰여있다.
좋은 말차를 사는 건 좋지만 너무 좋은 상점에 가서 살 경우엔 자신이 어느 유파에 해당하는 말차를 살 것인지, 어느 정도급의 차를 마실 것인지에 대해 직원이 물어올 것을 감안하는 게 좋다. 특히 친구에게 선물로 사다주려고 하는 것이니 알아서 추천해달라고 하면 대개 직원이 매우 곤란해한다.
차라리 잘 모르니까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좋은 걸로 추천해 달라고 하자. 아니면 국내에서 유명한 브랜드로 입문하는 경우에는 대충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잘 먹는 거 알아뒀다가 그걸로 달라고 하는 것도 낫다. 어차피 한국에 제대로 수입되는 브랜드는 정해져 있다.
일본에서 말차를 마실 때의 예절이다.
다과를 먼저 먹고 받은 찻그릇을 왼쪽으로 돌려서 세 번에 나눠서 마시며 마지막에는 다 마셨다는 의미로 후룩 소리를 낸다....라고 일반적으로 다과회 방식에 나와있는데, 그 말차사발 사이즈에 맛있게 차를 내서 식기 전에 다 마시려면 딱 세 모금 정도가 나오는 데다, 유화가 풍부하면 싫어도 후루룩 소리가 난다.
여러 번 해 보다 보면 이것이 격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팽주에게 '당신 차 참 잘 우렸소.'라고 말없이 칭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게 더 맞다. 게다가 원래 다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도자기는 일본에서 보석보다 비싼지라 찻잔을 돌리거나 찻사발 등을 감상하는 시간이 들어가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지금도 다회에서는 가장 고급 말차와 고급 사발을 사용하는 것이 예절이다. 사발 중에서는 이도를 최고로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