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by Doc



신라와 고려 때 홍성했던 우리 차 문화는 조선조로 접어들며 거의 멸절의 수준으로 내몰렸다.


차는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상비약이었을 뿐, 기호음료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다. 역대 문집 속에 차에 관한 시문이 실려 있긴 해도, 연행 길에 사온 중국차를 마시는 호사 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공물로 바쳐지는 차는 일반에게 차례가 돌아올 만큼 생산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차 문화는 다산과 초의, 추사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 이 책 은 이 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집필되었다. 대부분의 기록은 다산에서 출발하여 초의로 수렴된다. 그 사이에 추사의 존재가 없었다면 초의차의 명성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탁월한 안목과 실천이 명맥이 다 끊어진 차 문화의 불씨를 되지펴놓았다.


이들이 마신 차는 대개 떡차였다.


잎차가 없지 않았지만 소량이었다.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 식습관으로 인해, 차의 강한 성질을 눅이기 위해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제다법이 발달한 것도 새롭게 확인했다. 이들이 마신 차는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녹차와는 다른 차다. 이런 것은 이 책 속에 수없이 많은 용례가 나오니, 옳다 그르다 시비할 일조차 못 된다.


우리의 차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조선 후기 민멸 위기에 놓인 차 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 선사(1786~1866, 이하 초의)의 노력과 사대부들의 차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비롯됐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당시 연경(현재 북경)을 출입하며 청의 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유학자로, 대개 초의와 교유했던 사람들이 주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에 부응한 것은 초의가 만든 초의차인데, 이는 우리 차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심어 주었던 좋은 차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초의는 어떤 연구 과정과 발심을 통해 초의차를 완성했던 것일까. 그 과정은 이랬다.


바로 그가 출가한 운흥사는 차의 산지인 화순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미승 시절 그곳에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 규범을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차에 밝았던 대흥사의 완호 스님(1758~1

826)이 겨울 한 철 운흥사 암자에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는 점도 초의가 차에 눈을 뜨게 된 배경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가 본격적으로 차의 연구에 매진한 시기는 1830년경이다.


이는 1815년 김정희(1786~1856)와 해후한 후 차에 대한 관심이 증폭돼 1830년경 <다신전>을 편찬에서 확인된다. 물론 김정희는 초의가 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다. 초의가 김정희를 만난 것은 1815년으로, 이해 겨울 첫 상경한 초의는 학림암에 머물며 수행할 때다.


이 무렵 김정희는 학림암으로 해봉 선사(?~1826)를 찾아와 공각소생(空覺所生)을 담론했고, 이 자리에 초의도 동석했다.


당시 초의는 해봉 선사와 김정희의 치열한 불교 논쟁을 곁에서 보면서 그의 해박한 식견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정희가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1733~1818)의 제자 완원(1764~1849)의 쌍비관에서 대접받았던 용단승설을 맛본 후 오묘한 차의 세계를 경험했던 이야기도 나눴을 것이리라.


그러므로 초의는 그의 차에 대한 깊은 안목과 관심에 주목했을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를 계기로 초의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선종의 차 문화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초의는 <다신전>의 편찬 과정에서 초의가 주목한 제다법은 명대의 초청법이다. 바로 뜨거운 무쇠 솥에서 차를 덖는 방법이다. 이는 잎차를 만드는 제다법인데 초의는 대흥사에 차밭을 만들어 본격적인 제다 연구에 매진한 결과 맑고 경쾌하며 단맛과 싱그러움이 감도는 한국 차의 특성을 함의한 초의차를 완성했다.


이는 그가 제다법에 대한 해박한 이론을 두루 섭렵한 후 이를 토대로 제다의 실증 연구에 매진한 결과라 하겠다.


차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추사와 초의의 차담으로 귀결된다.


차는 차로 말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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