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의 격리 병동 생활

76일간의 병원생활

by BH

간혹 길에서 넘어진 어린아이들은 바로 우는 게 아니라 주변의 어른들이 괜찮아? 안 다쳤어?라고 걱정해 주면 그때부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서럽게 울곤 한다. 혹은 일하는 동안은 빠듯한 일정에 피곤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면서도 정시에 출근해서 문제없이 일하다가, 휴가를 받는 순간 크게 앓는 경우가 있다. 내 몸도 똑같이 누군가 알아봐 주길, 크게 아플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내 발로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고, 가던 길에 꽃을 보고 예쁘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병원에 도착한 이후는 기억이 없다. 정신 차리니 나는 1인실에 누워있었고, 기숙사로 돌아가서는 안되기에 퇴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검사를 받고 입원수속을 밟고 병실로 가는 과정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열이 높았던 것 같다. 39도의 열에 내 발로 자전거를 타고 병원까지 가서 입원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 주 토요일에 첫 출근이 예정되어 있던 카페 아르바이트는 힘들게 합격했는데 입원하게 되어서 못 가게 되었다고 죄송하다는 연락을 하면서 아쉬워했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결핵은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기 때문에 격리차원에서 1인실 입원이었고, 연락을 받고 온 교환학생 담당 직원분이나 간호사 등 모두 공사현장에서 쓸 법한 두꺼운 방진마스크를 쓰고 병실로 들어왔다. 나 역시도 그런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지금이야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가 익숙해졌지만 당시에는 마스크가 너무 갑갑했었다.

일본병원은 한국과 달리 기본으로 제공되는 환자복이 없었고 개인이 옷을 준비해서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학교 가려고 책가방만 메고 나온 나에게 갈아입을 옷이며, 세면도구와 같은 병원생활에 필요한 용품이 어디 있겠는가? 연락을 받은 학교 담당자분이 유니클로에서 갈아입을 옷 두 벌을 사주셨고, 옆 방 친구가 챙겨준 내 세면도구등을 가져다주셨다.

엑스레이로 확인 결과 결핵이 맞았고, 결핵균으로 인해서 폐에 물이 차는 흉막염 판정을 받았다. 어쩐지... 교환학생 오기 직전에 매일같이 친구들과 술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 항상 가슴이 따끔따끔하길래 설마 심장병??! 했었는데.... 결핵이었다니! 이미 나는 한국에서 결핵에 감염된 상태에서 일본에 온 것이었다.

금요일에 입원해서 주말 내내 병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고, 월요일에 결핵 전문 병원으로 전원 하게 되었다. 병원을 옮긴다길래 구급차를 타나?라고 생각했는데 보호자인 료보상과 평범하게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해당 병원에는 별도의 결핵병동이 있었고, 아마 병실이 비길 기다리는 동안 입원했었던가? 여기서도 이틀간은 혼자서 병실에 갇혀있어야 했다. 여전히 병실 복도에도 발을 디디지 못했고, 샤워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더니 샤워실 대신에 따끈한 물수건을 여러 개 넣어주셨다. 여전히 열에 시달리느라 6월이었음에도 밤새 추위에 덜덜 떨었다고 하니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주셨고, 결핵병동으로 옮기는 날 아침에는 폐에 찬 물을 빼냈다. 흉부 엑스레이를 보여준 의사가 이만큼이 환자분 폐인데 여기 반 이상이 하얗죠? 이게 다 물이 차있는 거예요. 라면서 굵은 주사 바늘을 등에서부터 꽃아 넣어서 물을 빼냈고, 노란 액체가 가득 담긴 봉투를 보여주면서 이게 내 폐에 차 있던 물이라고 했다. 주사도 아팠었고 저런 게 내 몸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도 어쩐지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크게 챙길 짐은 없었기에 가방을 둘러메고 간호사분을 따라서 별도의 격리된 결핵병동으로 이동했는데, 감염의 가능성 때문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도록 설치해 놓은 두꺼운 철문을 지나가면서 정신병원이 이런 느낌일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두 달간의 일본 결핵병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8인실 여자 병실의 문 앞 침대가 내 자리였다. 결핵은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병하는 병이기에 40대 이상의 일본인들이 잔뜩인 병실에 20대 한국인이 들어가니 얼마나 낯선 풍경인가. 병동을 옮기고 바로 증세가 좋아진 건 아니어서 여름이 가까운 6월에도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밤마다 덜덜 떨었지만 처방약이 잘 들어서 일주일쯤 지나자 식욕도 돌아오고, 밤에도 얇은 이불을 덮고 자게 되었다. 컨디션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결핵균의 전염성이 있어서인지 퇴원은 할 수 없었다. 언제가 될 거라는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기운을 되찾은 나는 병원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여전히 환자복이 따로 지급되지 않았고, 환자복을 빌리는 것도 돈이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세탁도 해야 했고 목욕탕 사용도 지정된 시간이 있었다.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숙지해서 병원생활을 해야 했기에 서툰 일본어로 두 번 세 번씩 확인했고, 바쁜 간호사보다는 같은 병실의 환자분들에게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졌다. 어떤 분은 간사이벤이 너무 세서 몇 마디 못 알아들을 때도 있었지만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분은 오사카분 답게 말하는 게 웃겨서 얘기하는 게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에 주변 분이 병문안 오시면서 가져다 주신 책이 있어서 당시 가방의 필수품이던 전자사전으로 검색해 가면서 일본 원서도 읽고, 휴게실에 놓여있던 신문도 헤드라인을 읽어보고, 누가 말 걸면 대화하고 그런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나날을 보냈다. 매일 컨디션 체크하러 오시는 간호사분이 왜 이렇게 맥박이 빨라?라고 하면 쌤 때문에 설레서요~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병원생활에 잘 적응했었다.(나는 원래도 조금 맥박이 빠른 편인 것 같고, 이모뻘에 가까운 여자 간호사분이셨다 낄낄)


병원생활은 평화로웠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핵약을 먹기 시작하고 식욕은 금방 돌아와서 한참 아플 때에 우동 한 그릇도 깨작대던 때와는 달리 하루 세끼 병원식을 맛있게 먹었다. 한국과는 다른 조리법과 맛이었지만 나름의 일본 가정식이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병원식마저도 깨끗하게 해치우고 복도에 있는 반납대에 가져다 두면 식사 끝! 그렇게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병실의 사람들도 보게 되고,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바깥으로 움직이고 싶은데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병원 건물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리고, 복도에 서서 바깥으로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기도 했다. 병실 단위로 샤워시간이 주어져서 단체로 샤워를 하기도 하고, 병동 안의 코인세탁기로 내 빨래도 했었다. 학점에 대한 불안도 있었지만 내가 당장 손쓸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주위에서도 건강 회복에 신경 쓸 시기라고 말해주었다. 간혹 인도네시아 교환학생 친구에게 보고 싶어~라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었다. 빨리 건강해져서 돌아오라는 상냥한 답문을 받으면 조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결핵 병동에서는 매주 균 검사를 위해서 가래를 뱉었어야 했는데 목에 걸리는 게 없는데 어떻게 강제로 가래를 뱉을 수가 있겠는가! 덕분에 매주 코로 관을 넣어서 억지로 가래를 채취하고 엑스레이도 주기적으로 찍으면서 상태를 확인했었다.

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가족에게도 전해졌고 입원하고 보름쯤 된 시기에 한국 학교의 교환학생 담당 교직원분과 엄마가 병원에 왔다. 당시에는 스마트폰 대신 폴더폰과 아이팟으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매일 저녁에 엄마가 국제전화를 걸어줬었고 출발 전날에도 한국에서 뭐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봤었다. 가져올 수 있으려나..? 싶으면서도 엄마한테 떡볶이랑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었고 엄마는 출발 전날에 그걸 포장해 놨다가 일본 병원까지 들고 와줬었다. 진짜 감동이었다. 그 새 위장이 많이 줄어들어서 고작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을 혼자서 다 못 먹기는 했지만 계속 먹고 싶던 음식이었고, 엄마가 나를 위해서 들고 와줬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눈물 젖은 떡볶이. 엄마와 함께 온 교직원분은 내 병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담당 의사와 상의했었다. 일본에서 혼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바에는, 가족들이 있는 한국에서 치료를 받는 방법을 여쭤봤었는데 결핵은 호흡기로 전염되기에 격리된 공간이 필요하다며, 오사카에서 후쿠오카까지 이동해서 거기서 부산행 1인 객실을 예약해서 배편으로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꼭 한국으로 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내가 목표로 했던 교환학생 생활은 아직 시작도 못했기에 그냥 일본에서 버티겠다고 했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조금은 불안한 시간을 한 달쯤 보냈을 때, 한 층 위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아마 병세가 호전되어서였겠지. 덕분에 병실을 옮기면서 처음 외출허가를 받아서 기숙사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다른 환자들은 종종 외출허락을 받아서 한 번씩 바깥을 다녀왔었는데 나는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 거주자여서 외출도 한번 하지 못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본은 장마에 들어서서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한 달 만에 익숙해진 동네에 내릴 수 있었다. 친구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내 방에 들러서 짐만 챙겨서 당일 저녁에는 들어온다는 조건이었기에 마음이 바빴다. 냉장고 상황도 점검해야 했고, 방정리도 해야 했고 또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서 나를 걱정할 친구들에게 페이스북으로 연락도 해줘야 했다. 공기도 답답하고 비가 와서 날은 습한 탓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챙기고 허겁지겁 급하게 저녁 배식시간이 다 되어서 병원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새 병실은 볕도 잘 들고 입원한 인원도 많지 않아서 조금 더 쾌적한 느낌이 있었지만 오히려 혼자라는 불안감은 더 커졌다. 매일 저녁마다 여전히 엄마는 국제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물어줬지만 병원 생활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1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이 점점 흘러가는 게 불안했다. 이런 불안을 얘기할 사람도 없었고 당시의 나는 상황변화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었고, 결국 하루는 병원 복도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계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병원이 떠나가라 울면서 나를 달래주는 선생님에게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갇혀있는 것도 스트레스받는다고 잔뜩 악에 받쳐서 얘기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신체적으로 크게 불편한 곳은 없음에도 격리된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니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이 많이 어렸고, 병원분들도 많이 당황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그런 큰 소동 후에는 나도 좀 부끄럽기도 했고, 금방 2층에서 같은 병실을 쓰던 분이 3층으로 올라와서 말상대가 되어주셨다. 그리고 3층 병실은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식당에 모여서 같이 밥을 먹는 시스템이어서 그렇게 식당에서 여러 사람들과 얘기도 하면서 또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것은 연못 근처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빨갛고 파란 수국 꽃이다. 3층 병동에서는 병실 바깥으로는 자유롭게 산책하는 게 가능해서 종종 산책 삼아 병원 부지를 돌았었는데 병실에서 보이던 연못 근처에 피어있던 수국꽃이 아직도 선명하다. 수국이 토양의 성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수국꽃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습하고 후덥지근했던 날씨에도 매일 조식을 먹고 남긴 식빵귀를 들고 나와서 수국을 구경하고 연못에 사는 잉어들에게 던져주던 기억이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8월 6일! 드디어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입원이 정신없었듯 퇴원도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병원비 수납이었다. 집에서 따로 지원받지 않고 내가 저축해 놨던 돈과 아르바이트로 교환학생 생활을 해야지!라고 생각했었기에 두 달간의 병원비는 전혀 예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생활비로 쓰는 일본 통장에 들어있는 잔액을 다 털어도 병원비의 반의 반도 충당할 수 없었고, 일본학교에서 든 보험으로는 결핵은 커버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한국에서 송금을 받아야 했는데 수수료나 환전환을 써야 하는 번거로운 문제가 있어서 동생이 여행을 겸해서 n백만 원의 돈을 들고 일본으로 왔다.

76일간의 길었던 병원생활이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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