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처음 맞이한 여름은 유독 더웠다. 2012년 여름에 유독 더웠던 탓도 있지만 계절이 바뀌는지도 모른 채 병원에만 갇혀있어서 체력이 부쩍 떨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신생아로 돌아간 것 같은 체력이지만 지금까지 못즐긴 일본생활도 즐겨야하고 학교생활도 해야하고 빵꾸난 학점도 채워야해서 마음이 급했다. 그 와중에도 한달에 한번씩은 자전거타고 30분정도 떨어진 거리의 병원에 가서 결핵 정기검진을 받고, 결핵약을 잘 먹고있다는걸 보고하기 위해서 다 먹은 약 봉지를 들고 보건소에도 갔어야했다.
[8월]
퇴원하자마자 한국 단기문화 체험에서 만난 일본친구들을 만나서 두달동안 못마셨던 술을 마셨고 바로 시가현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가서 2박을 하고왔다. 친구가 비와코에서 하는 불꽃놀이에 데려가주었고 어머님은 감사하게도 내 유카타까지 준비해주셨고 심지어 입혀주셨다. 여기저기 옷매무새도 만져주시고 오비도 묶어주셔서 그럴듯한 모양새로 일본의 하나비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카타는....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자꾸 걸을 수록 옷이 풀리는 느낌이고 게타도 불편하고. 물론 안에는 반팔이랑 반바지를 입고있었지만 풀리기 쉬운 옷을 신경쓰면서 조신하게 걷는건 너무 불편했다.
친구네 집에서 시원하게, 맛있는것 얻어먹으면서 잘 쉬고 돌아오자마자 그 다음날은 바로 공항으로 동생을 마중갔다. 동생은 병원비를 들고와준 것 뿐만 아니라 양 손 가득 엄마의 반찬과 먹을거리들을 들고와줬다. 몇달만에 만나는 동생은 너무 반가웠지만 일본의 여름은 너무 더웠으며 나는 두달간의 병원생활로 체력이 바닥이였고, 아르바이트도 못해서 거지였다. 학기 시작하고 관광이란걸 하기도 전에 입원했던지라 나도 아직 길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동생이 가보고싶다고 하는 박물관같은 곳을 위주로 계획을 짜고 몇군데 갔다오니 동생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였다. 지금도 두고두고 동생한테 미안한것이 에어컨이다. 2012년 여름은 역대급으로 더웠었는데, 나는 여름 내내 에어컨을 켜지않고 선풍기 한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동생이 왔으니까 에어컨을 틀어줬는데 그것도 저녁에 하루 한시간만 틀어줬다. 전기세와 수도세를 학생 개개인이 부담했기에 어떻게든 공과금을 많이 내지않으려고 했었다. 막상 집에도 에어컨이 생기고 틀어보니까 요금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그렇게 야박하게 굴었는지... 그래서 얼마전에는 술이 조금 도는 정신에 동생한테 그때 에어컨도 한시간만 틀어줘서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아닌밤중의 뜬금없는 사과에 동생은 어리둥절해 했지만.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교환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은 나를 위해서 자료를 따로 모아주셨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에는 그 자료를 보면서 공부해야지! 라고 마음먹었었지만, 나는 20년간 방학에 공부란걸 해본적이 없었다. 학기중에 세운 공부계획은 전혀 지키지않는 삶을 살아왔기에 일본에서라고 다를게 없었다.
너무 더워서 현관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더위에 지쳐있으면 그 앞을 지나가던 친구들이 말을 걸기도 했었고, 저녁에는 여전히 선풍기 한대로만 무더운 간사이의 여름을 버텼다. 그리고 8월 하순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학교 바로 앞의 편의점!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1분만에 출근이 가능!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되지않을까?!
[9월]
2학기가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새로운 교환학생 친구가 왔고, 이번학기는 주1회, 수요일마다 오사카대학에 가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오사카대학의 문부성국비장학생들이 듣는 강의를 우리도 수강할 수 있었기에 나는 한자, 일본의 경제, 일본의 역사 수업을 선택했다. 매주 수요일 아침에 각자 점심도시락을 챙겨서 기숙사에서 출발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사카대학까지 등교했다. 각자 신청한 수업에 맞춰서 헤어졌다가, 점심시간에 만나서 학생식당 한쪽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의 두 과목을 버티고 해가 어둑해질때쯤 학교로 돌아왔다. 기숙사 바로 옆의 학교로 등교했던것과는 다르게 지하철도 타고 버스로도 갈아타야하는 등교길이였다. 사람이 넷이였기에 버스 맨 뒷자리에 앉으면 한명은 필연적으로 가운데자리에 앉아야했고 그때마다 우리끼리 바보석이라고 얘기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우스갯소리로 그 자리에 앉았다가 버스가 급정차 하면 데굴데굴 굴러서 기사님한테 가서 인사하고 와야한다는 농담을 했기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버스는 한국만큼 급정차도 안하고 버스가 멈추기전에 일어서는 사람도 없어서 굴러갈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선택한 과목은 한자, 경제, 역사 수업이였다. 당연히 (일본의) 한자, 경제, 역사 수업이였다. 문부성 장학생들을 위한 수업이었기에 당연히 일본 이외 국적의 학생들과 수업을 들었고, 조금 더 규모가 큰 학교였다면 이런 느낌으로 교환학생 수업을 받았으려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나는 일주일에 세번, 혹은 네번씩 아르바이트를 했고 통금이 간당간당한 시간에 들어왔다. 아르바이트와 수업 이외에도 소소한 이벤트들이 있었다. 기숙사 관리인분이 교환학생들을 비와코라는 큰 호수에 데려가주셨었고, 아는 분이 교환학생 네명을 데리고 다카라즈카 관람도 시켜주셨고, 학교에서는 필드워크로 교토에 가서 마츠리를 구경했었고, 시가현의 친구네 집에 또 놀러갔으며, 같은 결핵병동에 입원했던 분과 오사카의 가이유칸에 놀러가는 등의 자잘한 외출이 있었다. 학교는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교환학생들을 다양한 이벤트에 불렀었는데, 동네에서 하는 만요 콘서트 라는 행사의 사회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무대에 서면 뚝딱대는 나는 당시에도 어색했고, 긴장해서 제대로 했는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동네의 어른들이 우리를 굉장히 귀엽게 봐주셨고, 샤미센이나 일본의 전통 춤 같은걸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좋은 경험이었다.
[10월]
이번달에는 JLPT시험의 접수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두번정도 JLPT2급 시험에 응시했었으나 시험치다가 자꾸 졸아서 성적을 말아먹고 여전히 나는 일본어 자격증 하나 없는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응원에 힘입어서 1급을 신청했다. 고로, 교환학생들의 수업시간은 JLPT시험대비를 위한 문제풀이로 채워지게 되었다.
호주의 단기교환학생들이 2주 일정으로 학교에 왔고, 덕분에 우리들도 함께 놀러갈 수 있었다. 1박 일정이여서 아르바이트 때문에 안가려고 했는데 교환학생 담당 직원분한테 한소리 듣고 그냥 아르바이트 시프트를 바꿔서 갔었는데 가기를 잘했다. 같은 효고현의 미가타군 카미쵸 오지로구라는 곳이었다.(효고현이였고, 버스를 타고 엄청 갔던 기억밖에 없어서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뒤져서 겨우 어디였는지 지명을 찾아냈다 후후) 숙소로 묵었던 곳이 산에 있는 별장같은 곳이었는데 운무가 진짜 장관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는 사람이여서 사진은 남아있지 않은데 숙소 앞에서 봤던 동이 터오던 하늘과 자욱하게 깔려있던 운무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밤에는 교환학생 넷이서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목욕도 즐기고 오는 길에는 히메지성을 들렀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사카성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유는 엘리베이터에 LED모니터로 잔뜩 꾸며놓아서 전통적인 것을 기대하고 갔다가 입장료가 아까웠기 떄문이다. 그런 면에서 히메지성은 오사카성에 비해서는 만족스러운 관람이였다. 당시에는 히메지성 천추락이 공사중이여서 그걸 못본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성이 예뻤던 기억은 남아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왜 아르바이트 있어서 여행 못간다고 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오히려 이때 아르바이트를 할 게 아니라 더 열심히 여행다니고 놀았어야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아쉬움이 든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집에는 손 벌리지 않고 일본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집에서 주기적으로 두달에 한번씩 먹을것과 옷을 보내준 덕분에 큰 돈 쓰지않을 수 있었던것도 있다. 학생때 두달에 한번씩 밑반찬이나 옷가지, 이것저것 자질구레한것까지 챙겨서 보내주던 국제택배는 지금까지도 부모님께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10월의 굵직한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스피치 대회! 스피치 대회는....정말 잊을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들었다. 내 스피치 주제는 '87일간의 병원생활'이었다.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외국의 병원에 결핵때문에 입원하게 되었고, 가족과 떨어져서 투병하는 생활은 힘들었지만 주변 사람들 덕분에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내고 많은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고, 선생님들이 계속 첨삭해주시고 연습시켜주셔서 원고는 머리속에 완벽히 들어있었다. 그리고 스피치 무대에서 나는 대성통곡 했다. 분명히 힘들었던 시간을 얘기하면서 조금 울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었던 감정을 살짝 보여주었다가 씩씩한 미소를 보여주면서 스피치를 끝내고 상을 받는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였는데 조금 울컥한다는게 엄청 울컥했는지 눈물이 계속 났다. 속으로는 멈춰!!! 라고 생각하는데 왜 눈물샘은 이런 데서 터진건지. 덕분에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스피치를 마치고 내려오니까 그제야 눈물이 그쳤다. 당연히 수상은 하지 못했고 흑역사를 하나 적립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본어로 내 이야기를 하는건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