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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남이 Jun 23. 2024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내의 임신을 산부인과에서 확인한 후 처음에는 아이가 생겼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몸에 뚜렷한 변화도 없고 병원에서 준 콩알만 한 사진 한 장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둘이 아닌 셋이 됐구나'라고 확실히 체감한 사건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출퇴근길'에서였습니다. 부부 모두 서울에 직장을 두고 있어 하루에 적어도 왕복 3시간 정도는 자동차 안에서 옴짝달싹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 했거든요. 이는 임산부에게는 곤욕과도 같습니다.


임신부는 보통 4~7주 사이에 입덧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저희 아내의 경우 차를 타면 안 그래도 간혹 멀미를 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면서 ‘입덧'까지 시작하며 어려운 상황에 닥치게 됐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하죠? 출퇴근길에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내는 의자 등받이를 기울여 누워있는 시간이 잦았고, 헛구역질하는 날이 많아 항상 검정 비닐봉지를 차 안에 비치해 뒀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의자를 미리 히터로 데워놓고나 아내의 좌석을 최대한 뒤로 젖혀 이동하고 안전 운전하는 정도가 최선이었습니다. 고생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내의 입덧은 생각보다 짧게 끝이 났습니다. 그러던 제 기억 속의 어느 날, 퇴근길에 문득 아내가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 같이 육아휴직할까?” / “뭐라고 ㅋㅋ?”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이 사람 꽤나 진지하더라고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공동 육아휴직’. 부모 중 하나는 직장을 다니고 다른 하나가 아이를 돌보는 형태의 육아휴직을 생각해 본 적은 간혹 있었지만 아내와 동시에 육아휴직을 한다는 건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사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육아휴직’이라는 단어에 대해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분 그리 많지는 않다고 봅니다.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와야 하는 중책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회에서는 커리어를 쌓고 ‘승진’이라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아 보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당돌한 아내는 제게 ‘공동 육아휴직’이라는 말을 꺼내 든 겁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반사적으로 “그건 안 돼”라는 말을 던지고 주저리주저리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놨습니다. 아무리 휴직 체계가 잘 돼있는 공무원 조직이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정말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당장 수입이 반토막 나고, 회사에서는 제가 휴직하는 만큼 동료들과의 격차가 벌어질 게 뻔해 보였으니까요.   

   

마음이야 당연히 육아휴직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럴까?”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당시 골머리 썩이는 회사 업무 하나가 있어 스트레스가 점점 가중되고 있었고, 이상하게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는 날들이 지속된 시기여서 당장이라도 좀 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습니다. (육아는 쉬는 게 아니지만요.)


업무 고민하다가 큰 사고 날 뻔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운전 중 교차로에서 교통신호를 놓쳐 빨간색 불을 지나다가 측면에서 오던 차량에 크게 부딪힐 뻔했거든요. 차량이 저를 그대로 들이받았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이 모든 걸 뒤로하고 그래도 저는 일단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돈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네요. 가끔 아내 홀로 육아휴직을 한다는 가정 하에 우리 가계의 수입은 어떻게 변화될지 엑셀로 그려본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입이 줄어들면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1년 정도는 버틸만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공동으로 육아 휴직을 한다면 가계 운영은 어떻게 될까요? 제 머릿속 결론은 그냥 ‘노답’이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굉장한 절약을 한다 가정하더라도 당분간 둘의 수입이 반토막 이상으로 줄어든다는 건 진짜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주담대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생활비, 곧 들어갈 양육비 등만 봐도 맞벌이해야 감당이 그나마 가능할 것 같은데 한 명도 아닌 둘 다 동시에 휴직 들어오자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요.     


퇴근길의 어느 날, 아내가 제게 던진 한마디에 제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아내의 말은 단칼에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도 육아휴직 하고 싶은데, 진짜 해도 괜찮은 걸까?’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한동안은 휴직에 대한 별다른 언급 없이 보통날의 지루한 출퇴근길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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