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해서 남이었던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기적이다. 완벽하게 100% 객관적인 조건에 만족을 하는 부부는 당연히 없다. 다만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맞춰가면서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없던 아이와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성인 남녀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이 아이는 정말로 잉태되기 이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아이다. 데이트의 과정, 알아가는 과정도 없이,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는 그 흔한 MBTI도 모른 채 아이는 이 세상에 나타나 두 성인과 한 가정을 이룬다. 남이었던 두 사람이 한 가정이 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부모에게는 아이가 처음이겠지만, 아이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다. 순수한 백지에 하나하나 새롭게 새겨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작은 변화에도 쉽게 아플 수 있다. 갓 태어난 기린보다 연약한 이 아이에게 처음 보는 세상을 가르쳐주는 사람, 세상에 반응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바로 부모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 교육 준비가 중요하다. 부모는 자신의 시각으로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쳐준다. 매사에 부정적인 부모 밑에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 아이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아이가 되기는 어렵다. 반면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웃과 따뜻한 관계를 맺는 부모의 아이는 낯선 사람에게도 호의적이고 친절하며, 어려움이 닥쳐도 이기고 일어날 확률이 높다.
칼비테는 가족을 이루기도 전에, 그러니까 아내를 만나기도 전에 가족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 또한 칼비테의 R=VD였을 것이다. 아내는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많은 여자들 가운데 아내를 골랐다. (골랐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배우자를 고른다. 인생의 모든 것이 선택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칼비테가 그 아내를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더 좋은 가정 환경을 만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결혼은 하지만 아이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부부에게 이런 말은 매우 부적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사람이 어린이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다 컸다고, 법적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정말 다 큰 것은 아니다. 여러 시련을 겪기도 하고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면서 성장하고 더 '사람'에 가깝게 되어간다.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완벽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은 계속 성장한다는 말이 아닐까. 완벽한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칼비테는 아내를 만나기도 전에 자녀 교육에 대해 공부했고 자신만의 교육법을 정립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건강한 아들을 주시면 자신의 교육법으로 성공적인 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칼비테는 건강한 아내를 얻었고 자녀를 얻게 된다. 하지만 첫째는 병에 걸려 죽고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은 저능아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들은 건강했다. 칼비테는 아들의 지능 상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교육법으로 아이를 가르쳤다.
칼비테가 아들을 성공적으로 교육했다는 것이, 아들이 어린 나이에 학자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아들을 학자로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어린 학자로 키우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칼비테 교육법], 81p
그렇다면 칼비테는 아들을 어떤 아들로 키우고 싶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칼비테가 연구하고 스스로 정립하고 확신하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아이에게 실험까지 한 그 교육법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성공적인 교육법'이라고 하면 조금 더 이른 나이에 좋은 대학에 가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행복'이라고 포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칼비테는 자신의 교육법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들을 사람으로 키우려고 했다.
(중략)
아들은 건강하고 욕심 없고 이웃에 이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은 물론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칼비테 교육법], 81p
사람? 사람은 그냥 태어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아니다. '모글리'나 '늑대소년'과 같은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사람에게 발견되고 사회화 교육을 받기 이전에 정글에서 동물의 새끼로 자란 아이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조부모 뻘 되는 사람을 욕하고 폭행하는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갓 태어난 자기 자식을 죽이고 부모가 용돈을 주지 않았다고 죽이는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칼비테는 아들을 한 사회에서 진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지금 자녀를 키우고 있는, 그리고 자녀 계획이 있는 부모들은 한 번 생각해 보자. '나는 자녀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가'에 대해서 말이다.
칼비테가 말하는 '사람'은 큰 성공과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바에 의하면 그가 원하던 아이의 모습은 모든 방면에 균형을 이룬 사람이다.
칼비테는 아들이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 원했다. 기운차고 활동적이고 명랑한 젊은이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신앙 교육, 고전 인문학 교육과 여러 경험을 통해 정신의 힘도 길렀다.
당시 조기교육을 반대했던 많은 학자들은 칼비테의 놀라운 지능을 확인하고는 칼비테 아들이 이른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칼비테와 가장 친한 친구, 칼비테의 교육과 아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친구까지도 칼비테의 아들이 일찍 죽는다면 (심지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는다 해도) 모두 칼비테의 교육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조기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책상에서 오랜 시간 앉아만 있어야 했다. 지금처럼 병원이야 영양제가 흔하지도 않았기에 많이 아팠고, 또래의 아이들처럼 뛰어놀지도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건강이 나빠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 중에도 이런 말이 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칼비테의 주장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칼비테는 아이가 건강해야 공부도 하고, 경험도 하고, 생각도 할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섯 살 이전에는 절대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책상 교육을 시작한 이후에도 20분 공부하면 40분은 놀게 했다. 몸이 건강해야 지식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폭도 넓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칼비테는 아이의 감각을 섬세하게 기르고 강화시켜서 언어나 학문을 가르쳤다. 이 감각을 기를 때에도 모든 감각이 최대한 균형 있게 강화되도록 노력했다. 일반적으로 육체의 모든 감각을 균형 있게 강화시킨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혼의 힘이라니. 영혼의 힘이란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영역으로는 상상력과 부드러운 감정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음을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자면 신앙의 영역을 말한다.
칼비테 부부는 어린 마음을 교육하는 일을 중시했다고 한다. 어르고 달래고 칭찬만 늘어놓아 아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경건성의 법도에 따라 어떤 것은 억제하고 어떤 것은 독려하는 교육이다.
보통 어린아이가 부모를 때리고 떼를 쓰면, 다시 말에 불경건하게 행동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알아듣고 말할 수 있을 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키우는 개도 영특한 개는 열 번 정도 반복하면 주인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다. 어린아이도 어른의 표정과 반응으로 싫은지 좋은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즉,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때 넘어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애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라면, 그 행동이 몇살 때까지 가능할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촉법 소년'의 기사를 몇개만 읽어본다면 물렁한 훈육에 대해 조금은 경각심을 갖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했을 때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하고, 떼를 쓰는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은 아이의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영혼의 힘이란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의 힘이다.
상상력과 부드러운 감정이라고 말했지만 경건의 교육이 빠진다면 영혼의 힘은 길러지지 않는다. 상상력은 범죄자들이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들도 자신만의 부드러운 감정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들이 영혼의 힘이 강하다고 볼 수 있을까? (신앙의 관점에서 그들의 영혼은 죽어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칼비테는 아들을 책상에 앉혀 하는 교육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고 어른들을 만나게 하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직접 물어보게도 했다. 경제 교육을 위해 상인들을 만나게도 했고, 지리 교육을 위해 직접 어린 아들을 데리고 멀리 여행을 가기도 했다. 아들의 지식을 머리에만 고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지식이 머리에만 고이면 생각의 그릇을 키울 수 없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을 실천하고 지혜를 배우면 지혜를 실천하면서, 배웠던 개념의 실체를 배우고, 자기의 한계를 배우고, 더 겸손해지고, 스스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교육이 칼비테 교육법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계층에서는 칼비테 교육법, 바칼로레아, 하브루타 등 독서와 토론 교육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 입시학원에서 바칼로레아 교육을 한다기에 어떻게 시키는지 궁금해서 알아본 적이 있었다. 각 교육법이 진정 추구하는 목표와는 달리, 월 200만 원이 넘는 학원비에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독서와 수업 시간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을 확장하는 교육을 배우기 위해 사각형 건물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칼비테는 아들을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풀어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세상에 유익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는 말이다. 경건함을 지키고, 건강하고,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이것이 칼비테가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
아이는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세상에 나와 낯선 것들을 맞이한다. 익숙한 것이라고는 자주 들었던 부모의 음성뿐일 것이다. 누구나 완벽한 가족,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원한다. 성공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행복한 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결혼을 결정하고, '나의 시간'에 집중해서 출산을 결정하는 것이 보편화된 세상에, 결혼도 전에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 너무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그리 생소하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현재 속한 가정을 바라봐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미혼이라면 현재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부모는 자식이 어떤 삶을 살기를, 또 자신이 어떤 노후를 맞이하기를 바랄까. 기혼이라면 지금의 배우자와, 그리고 아이들과 3-40년 후 어떤 가족이 되길 바라는지 생각해보라. 몇푼 되지도 않는 재산으로 싸우고 얼굴만 보면 물어뜯는 가족이 되길 원하는지, 어려움이 닥치면 열일 제치고 달려오는 가족이 되길 원하는지 말이다.
현재 속한 가정의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미래에 생길 가정에 대한 미래도 그려보면 좋겠다. R=VD가 단순히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그린 가정이 현실화되기 위해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건설적으로 살아간다면, R=VD의 여러 사례들처럼 어느새 그런 가정이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