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졸업과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며칠 전, 카페에 새로 일하게 된 직원이 내게 물었다. "사장님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였어요?" 처음 듣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나? 19년부터 작년까지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내 무의식은 지난 3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 당시 나는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스스로를 문책하며, 사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이겨낸 지금에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당시 불행은 내게 '백신(vaccine)'이 되었고, 덕분에 지금 내 삶은 사력토처럼 단단해졌다.
졸업을 앞둔 어느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외식 산업학도인 내게 당시 가족 경영으로 운영하던 카페를 맡을 것을 권유했고, 사업체 운영이 처음인 나는 난색을 표했다. (당시 나는 학사 편입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카페 운영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을 모셨왔고, 결국 아버지의 설득 끝에 나는 그 밑에서 매니저 역할을 하며 일을 배워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당찬 포부는 졸업 후 한 계절만에 금세 사그라들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전문가라고 모셔온 점장은 사실 나와 별 다를 바 없이 카페 운영이 처음이었고, 개업과 동시에 모든 일을 내게 위임하며 매장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6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하고 점차적으로 출근 일 수를 줄여나갔다.
이에 당연하게도 내 통장잔고는 줄어들었는데, 반면 자괴감은 빠르게 늘어갔다.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내 이력서는 취업을 하기에는 너무나 매끈했기 때문에 나는 고심 끝에 저자본 창업을 계획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스마트 팜(현 스마트 스토어)' 사업이었다. 지금이야 너도나도 스마트 스토어를 개설하면서 다양한 상품을 소싱하고 있지만, 내가 시작할 당시만 해도 스마트 팜을 운영하기 위해 참고할 곳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무대포로 시작한 내 첫 사업이 보기 좋게 성공할리는 만무했다.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나, 스마트 스토어 개편과 동시에 경쟁 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내 스토어는 빙하기 공룡처럼 냉혹한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사장(死藏)되었다.
결국 나는 잘못 끼워진 단추를 다시 끼워보고자 취업을 준비했고, 배스킨라빈스 매장의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받아본 월급이 주는 쾌락은 달콤했다. 하지만 남은 인생을 '엄마는 외계인'과 '아몬드 봉봉'을 뜨는 일에 허비할 수 없던 나는 또다시 학사 편입을 위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후 6시 퇴근과 동시에 곧장 독서실로 달려가 새벽 3시까지 토익 책을 씹어먹듯이 탐독하는 것을 매일 했고, 잘 풀릴 모양인지 두 달 만에 내 토익 점수는 만점 고지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같이 밥을 먹자고 나를 불러내신 아버지께서는 내게 식당을 운영할 것을 권유하셨다. 하지만 당시 창궐한 코로나와 함께 신천지 사태까지 더해져 줄도산되던 주변점포들 사이에서 당당히 성공할 자신이 없었던 데다, 경제적인 여유도 심리적인 여유도 없던 나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니가 식당을 운영해야 아빠가 행복해질 것 같다."라는 한 마디에 결국 내 굳은 결심은 시간 지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40살 이전에 외식점포를 운영하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의 첫 줄을 차지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참 운이 좋은 건지 29살 나는 첫 점포를 운영하게 되었다. 물론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집안 막내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염려됐던 가족들은 내 경영에 훈수를 두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의 장기짝처럼 움직여야만 했는데,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두 달간의 시행착오 끝에 분식으로 정해진 우리 식당의 메뉴들은 꽤 불티나게 팔렸는데, 우리 매장 시그니처였던 국물 떡볶이와 돈가스는 코로나의 방해 속에도 SNS와 블로그 바이럴을 통해 인근 대도시까지 마중을 나갔고, 나는 내 음식을 먹기 위해 시간을 내가며 줄을 서는 사람들의 모습에 형용하기 힘든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전성기는 에당 아자르의 전성기만큼이나 짧았다. 우리 매장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았던 넓은 잔디밭은 21년 9월 길고도 길었던 장마로 인해 제 기능을 잃었고, 동시에 터진 오미크론과 치솟는 물가상승으로 인해 경기까지 주저앉게 되자, 불과 지난달까지 북적하던 우리 매장 앞은 낙엽만 흩날리게 되었다. 결국 직원들도 하나 둘 매장을 떠나게 되었고, 스무 평 남짓한 매장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 삶은 쾌속으로 악순환의 구심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 때문에 외형은 망가져가기 시작했고, 조금씩 모아 왔던 돈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그것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당시 그 악순환을 벗어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와의 실연까지 더해져 나는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기 힘들 정도로 약해져 갔는데, 이에 가족들은 내게 책임을 물으며 게으르다는 핀잔으로 나를 더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
아득했다. 마치 수렁에 빠져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염소와도 같았다. 결국 나는 그 수렁을 빠져나오기 위해 달콤하게 나를 유혹하던 대출을 받고야 말았다. 그러나 미봉책에 불과했던 대출은 더욱 빠른 속도로 나를 절벽을 향해 밀어붙였는데, 갓난아기 때 머리에 피가 나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나는 이때 당시 매일 밤을 통곡으로 지새웠다.
게다가 친한 친구의 자살 부고 소식까지 더해지자 나는 삶에 대한 의욕 자체를 잃어갔다. 밀린 대출을 갚기 위해 졸라매던 허리띠가 점점 목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