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이 처음으로 팔리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 친구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매 번 내 도움이 필요할 때만 전화를 거는 친구였기에 나는 폰 액정에 떠있는 그의 이름이 그렇게까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야, 희비 니 글 좀 쓴다 아이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없이 이어지는 뚱딴지 같은 칭찬에 잠시나마 대답을 고민했다. "잘 쓰는 건 아닌데, 가끔씩 쓰긴 하지." 역시는 역시였다. "유진이 교양 과제 중에 무슨 시 쓰는 게 있는데 니가 함만 도와주면 안 되나?" 본인 과제도 아니고 자기 여자친구의 과제를 내게 과감히 부탁하는 그의 시카고피자같이 두꺼운 낯짝에 감명을 받은 데다, 더불어 때마침 남는 게 시간이고 없는 게 돈이었던 나는 엉겁결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맨입으론 안 되고."
결국 나는 내 과제도 아닌 친구의 여자친구, 그것도 전공도 아닌 교양 과제를 위해 컴퓨터에 앉았다. 내 사명은 꽃을 주제로 쓴 친구 여자친구의 시를 고쳐 쓰는 것이었다. (사람은 고쳐쓸 수 없기에 나는 얄미운 내 친구를 고치는 것보다 그의 여자친구 시를 고치는 것에 더 큰 가능성을 두고 그 시를 한 자씩 고쳐나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당시 프랑스 문학을 솔찬하게 접했던 내겐 감수성이라는 것이 티끌이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그녀의 초고를 교열할 수 있었다. 이제는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 시이지만, 아마 겨울에서 봄이 넘어오는 시점에 개화하는 목련을 보고 먼 길 떠나 있는 낭군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주제로 썼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남은 감수성의 집합체이자 첫 상업 문학 작품은 고스란히 여러 개의 카톡방을 거친 뒤, 과제로 제출되었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날은 더워지기 시작했고, 종강과 동시에 샘솟는 도파민에 내 영혼을 내어줄 시기였다. 보름 간 전공 연계 프로젝트와 관련해 발리로 떠날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내게 선물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그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니가 그때 시 쓰는 거 도와준 교양 있잖아. 유진이 그거 에이플 맞았다 카더라. 고맙다고 전해주래." 뜻밖의 기프티콘에 들뜬 나는 하이디처럼 잰걸음으로 스타벅스를 향해 달려갔고, 내 창작의 대가로 받은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내 글이 가진 가치를 만끽했다.
친구 여자친구 과제 이슈 이후 상업적인 글쓰기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글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다, 당시 대학 내 최고 커뮤니티인 페이스북의 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와 대학교 커뮤니티 어플인 '에브리타임'에다 과제를 첨삭해 준다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당시 직장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YOLO'와 '휘게'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만연한 까닭인지, 당시 우리네 대학생들은 누가 누가 더 잘 노는지 대결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나는 예상외로 많은 작업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작업한 과제의 종류는 다양했다. 간단한 북 리뷰부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자연주의를 다루는 문예 사조, 그레고리오 성가부터 파가니니, 드뷔시까지 아우르는 클래식 음악, 캄필로박터 제주니와 관련된 질환,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 빛의 화가 램브란트와 관련된 미술사까지 다양한 주제와 관련된 리포트, 라우라 아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파블로 네루다의 <일 포스티노>등 문학과 관련된 영화 감상문, 심지어 나중에는 ppt까지 첨삭했다. 그렇게 다양한 의뢰를 맡다 보니 내가 듣는 교양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의 의뢰를 받았던 적도 있는데, 종강할 때 다가가 내 정체를 밝힐 때면 그들은 복면가왕 출연자가 가면을 벗었을 때 경악하는 방청객처럼 입 벌리며 까무러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매달 2~30만 원씩 모아들인 수입으로 당시 갓 출시된 에어팟 1세대를 껴보이며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내 꿈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꿈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짜게 식었다. 건 당 만원 짜리 과제를 위해 3시간씩 할애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나 자신에게서 권태를 느꼈고, '최저임금'이라는 폭력적인 단어는 내가 그 일을 영위할 수 없게끔 내 발목을 부여잡았다. 또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이때쯤엔 이 일을 다단순 용돈벌이보다는 사업적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흥미가 떨어진다.'는 것을 이때 가장 크게 체감했다. 때 마침 꽤 오랫동안 일했던 일가정식집에서 다시 나를 찾았고, 최저임금이라는 폭력적인 단어에 지배된 나는 다시 니트릴 장갑을 끼게 되면서 글 쓰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게 내 글쓰기 비즈니스의 첫 문장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