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비가 내리는 건가?"
빗소리에 잠을 깼다. 무겁게 눈을 뜨면서 긴가민가 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여태껏 내리다니! 내가 잠을 잔 것은 맞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커튼 뒤의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젖어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곳에선가 샤워기를 통해 구정물을 쉼 없이 흘려보내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눈을 부스스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도 별다른 바 없이 회색빛으로 어두웠다. 조명을 켜지 않으면 밤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밝기였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눅눅함이 묻어 나왔다.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양의 비가 줄줄 내리는 빗소리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비를 준비해 놓은 거야?"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때마침 [라베르탱고]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벨소리 선율이 어둠침침한 거실 공간에 안성맞춤이었다. 음악과 공간에 압도되어 점점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남편의 전화였다. 별거를 시작한 지는 일 년 반년 정도 된 것 같다. 내가 원하던 것은 깔끔한 이혼이었지만, 남편은 서두르지 말자며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었다. 일 년이 넘도록 나의 생각에 변함이 없으므로 결국 나의 뜻을 수용하였다. 이혼 관련 서류와 서명이 필요한 것들이 있어 오늘 오기로 했으나 스케줄에 차질이 생겨 오늘 오기 힘들 것 같다며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당신 바쁘면, 현지에게 부탁해 줘."
하루 정도 미뤄진 들 무슨 의미일까 싶었지만 마음이 그랬다. 결정이 난 이상 어떤 간극도 두고 싶지 않았다. 현지는 남편과 같은 로펌에서 근무 중인 나의 친구이다. 나의 일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낼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대인관계는 단절되었으며, 그나마 남편을 통해 내 소식을 듣던 지인들은 별거 후 그마저도 못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안부가 궁금해서라도 시간을 낼 것이다.
"그래, 그럼. 내가 현지한테 연락할게. 수고해!"
이혼을 고집했던 것은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유책 배우자처럼 내 앞에서 언제나 소심하게 굴었다. 그 사람과 나의 인생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었고 나는 그것을 마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없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고 어떤 자극에도 노출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자발적 감금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오후 2시쯤 현지가 우리 동네로 오기로 했다. 나는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어쩌다 외출을 할 때면 늘 새로운 가게와 간판들이 생겨났다.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가는 것마저 야속할 때가 있다. 금세 봄이었는데 어느덧 장마구나, 싶은 생각에 또 한 번 올곧게 흘러가는 세상이 사실, 새삼 서글펐다.
느리게 산책하 듯 걷다 보니 처음 보는 땅콩 건물이 눈에 띄었다. 3층 짜리 아담한 건물에 초록색 지붕을 얹고 있었다. 조화로 보이는 담쟁이들이 건물 외벽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3층에 자리 있을까요?"
"있습니다. 혹시 저희 가게에는 처음이실까요?"
"네."
"그러면 여기서 주문하고 올라가시면 음식 전용 엘리베이터로 주문하신 음식이 올라갈 거예요. 엘리베이터 상단에 주문번호 표시 되니깐 확인 후 가져가시면 됩니다."
외형만큼이나 색다른 카페였다. 시그니처 샌드위치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네 감사합니다. 번호표 가지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저...... 혹시 죄송하지만 사람 엘리베이터는 없나요?"
"앗! 죄송해요. 저흰 음식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어서요....."
직원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살짝 웃어 보이곤 계단 난관을 의지해 3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아담한 공간이 안정감을 주어 약속 장소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숨을 고르며 창가에 자리를 잡고 현지에게 문자로 장소를 입력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어떤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로미 엄마...... 맞죠? 로미 엄마!"
문자를 입력하던 나의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멀리서 보고 설마설마했어요. 로미 엄마 맞았구나. 너무 안 보여서 이사 간 줄 알았어요."
'젠장할!'
여자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도 알은체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외면하고 지나가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말을 걸어오다니,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표정으로 말이다.
애써 태연한 척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만이에요. 미희 엄마!"
여자는 나의 인사를 받고서야 더 평온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었다. 소름이 끼쳤다.
"왜 이렇게 말랐어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
"살이 올라도 이상하잖아요. 미희 엄마도 너무 야윈 것 같네요. 전보다 많이 늙어 보여요."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불쾌감의 표현은 이리도 설 되다.
-어딜 앉아요! 우리가 마주 앉아 커피나 마시며 노닥거릴 사이예요? 당신의 얼굴과 음성만으로 충분히 소름이 돋으니 그 자리에서 당장 비켜 줄래요!
마음은 그랬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모면해야 하나,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그때 마침 음식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띵똥" 하는 소리와 알림판에 주문번호가 표시되었다.
미희 엄마와 나는 동시에 일어나 각자의 트레이를 가지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무시하자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모처럼 나쁘지 않은 이 컨디션을 저 여자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담담하게 커피를 음미하며 용기를 냈다.
"미희 엄마! 미안하지만 일행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요, 자리 좀 비켜줄래요?"
"아! 그랬군여, 미안해요."
그제야 미희 엄마가 간단히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찰나, 굉음에 가까운 번개 소리와 함께 세상이 "번쩍" 거렸다. 순간적으로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금세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국지성 소나기가 쏟아졌다. 엄청난 양의 비가 굵게 쏟아져서 창 밖으로 하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그 위력에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넋을 잃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일어서려던 미희 엄마 역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슬며시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평온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무언가에 홀린 여자처럼 모든 것이 정지된 사람 같았다. 소나기에 매료된 것일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네요. 이번 장마는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비가 오는 것 같아요. 저 많은 비를 그동안 어디에 숨겨 놨을까......"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동공이 흐릿해진 채로 중얼중얼 거리는 듯했다. 얼핏 보면 내게 말하는 듯 보였으나 내게 하는 말들이 아니었다.
"저렇게 무거운 걸 어찌 안고...... 어찌 참았을까......"
난감했다. 그냥 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며칠을 내리고 내렸는데, 한 번도 내리지 않은 것처럼 쏟아지네요. 얼마나 참았을까, 얼마나 참았다가 터트려야 저렇게 쏟아버릴 수 있을까요? 저렇게 쏟아내고 나면 나아질까요?
나는 샌드위치 맛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무슨 글을 쓰나? 어떤 호응도 하고 싶지 않았으며 공감의 답변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또 멈추겠지요? 언제 그랬는냐 듯 멈출 거야...... 아무렇지 않게 해가 쨍쨍 내리쬐고 사람들은 이 징글징글한 장맛비를 잊겠죠? 그렇게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그렇겠지요?"
미희 엄마는 잠시 그렇게 다른 시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여운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행여 동조를 바랄까 봐 애써 외면하며 샌드위치를 더욱 크게 베어 물었다. 조금이라도 맛을 느껴보기 위해 열심히 저작만 해댔다.
"로미 엄마...... 그땐 미안했어요."
순간 온몸의 수분이 미간 사이로 밀려오는 통증을 느꼈다.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이 멈췄다.
[그땐] 이라니!
또 한 번 방심하다가 공격을 당했다. 맞다, 그런 여자였는데 내가 또 안일했다.
"마음이 다르지 않을 텐데 내가 그땐 너무, "
"그때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스럽게도 나의 본능이 단호한 거절의 표현을 보여주었다. 이 자리에 멋대로 앉을 때부터 매몰차고 노골적으로 거절 표시를 했어야 하는데 나의 불찰이었다.
미희 엄마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잠시 커피잔을 내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미희는 구름을 참 좋아했어요. 물론 하늘도요. 그래서 여자아이인데도 분홍색보다는 하늘색 옷이 더 많았어요. 장마철은 아주 싫어했죠. 뭉게구름이 많은 맑은 하늘의 날씨를 좋아했지요. 로미가 손톱을 많이 물어뜯어서 울퉁불퉁하잖아요. 우리 미희가 로미 손톱에 항상 하늘색으로 사인펜으로 하트를 그려줬었는데, 알아요?"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들킬 새라 나도 모르게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미희 엄마로 인해 어떤 자극도 받고 싶지 않았다. 미희 엄마는 보란 듯이 자리를 지키며 주절 걸렸고 나는 멍청하게 시선을 돌리고 나의 감정을 숨기느라 급급했다.
대단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사람이 이렇게 무식하고 무례할 수 있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란스러움에 비해 소낙비 부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졌다.
마침 폐지를 차곡차곡 리어카에 쌓아 올리는 노인네가 보였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잠시 급하게 몸을 피했다가 다시 폐지를 리어카에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옳다 구니! 하며, 노인네의 박스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사과하고 싶었어요. 너무 어렵게 얻은 아이여서, 내 꿈, 일, 인생 다 포기하고 오롯이 아이만을 위한 삶을 살았어요. 물론 내 선택이라 후회한 적은 없었지만 마음 한편으론 계속 무능해져 가는 것 같고 초라한 나 자신을 보게 되죠. 그러다가 우연히 아이들 등원하는 길에 로미 엄마 출근 모습 보면, 여전히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기 삶을 영위하는 모습에 괜한 자격지심이 있었나 봐요."
침착하게 말을 잇던 미희 엄마는 갑자기 울먹울먹 거렸다. 박스의 개수를 세면서도 미희 엄마의 말이 귀로 들어왔다.
'아홉, 열, 열하나, 열셋...... 젠장할!'
"정말 최근까지도 미희 이름을 입에 담지도 못했어요. 우리 미희 이름만 얘기해도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지금은 생각날 때마다 말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가슴에 묻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저."
박스의 개수를 세다가 미희 엄마의 주절거림에 결국 실소가 터졌다.
'정말 어이가 없네.'
아무리 몰두하려고 해도 박스 개수를 마저 헤아리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상련의 마음 따위로 위로받고자 하는 것일까? 먼저 동병에 선을 긋고 나의 모성을 잉여시간 따위에 비교했던 여자였다.
"진심으로 미안했어요. 잘 지내요! 이만 갈게요. 너무 내 얘기만 했네요. 미안해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만나서 마음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게 미희 엄마는 긴 주절거림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애초에 화해의 목적은 아닌 듯했다. 나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지, 사과를 받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정말 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잠시나마 부러웠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여자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따위 사과받지 않겠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가만히 앉아서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당해 주기만 한 기분이었다.
여자는 내게 남은 부채감을 해소하고 가벼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 덕분에 담담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봉인해 두었던 나의 오만 신경이 죄다 해제되었다. 내 몸 곳곳에 흩어진 모든 눈물을 모이고 있었다.
"난, 그 어떤 가해자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가장 큰 저주를 내리고 싶어......"
*****
따듯한 겨울.
눈이 많아 오히려 따뜻한 겨울.
녹지 않은 눈밭에 햇살이 반사되어 화사한 겨울.
그래서 그 햇살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던 그즈음.
입춘이 시작될 무렵이었을까.
언제나처럼 유치원에 갔던 5살의 로미와 미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