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루에 누워만 있었다. 숨만 쉬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어느덧 작열하는 태양빛에 아지랑이가 이글거렸다.
에어컨이 없는 자연에서, 여름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달랐다. 달궈진 바위 위에 놓인 지렁이처럼 말라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뜨거웠지만 태양을 피하지 못하고 꿈틀거리기만 했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세상이 회전하는 기분도 들었고 토를 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한 편으론 볕에 말라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싹 마르라고, 몸을 '쫙' 펼쳐 누워 가만히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세상이 온통 하얗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대청마루인데 이것은 침대의 느낌이다. 목덜미까지 하얀 이불이 곱게 덮여 있다. 이곳은 너무 춥다. 에어컨 바람에 오한이 들었다. 그러나 몸에선 홍수처럼 땀이 넘쳐났다.
"엄마.......!"
꿈일까! 로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내 몸은 침대 위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 칠 수록 어깨를 짓누르는 힘에 제어당하는 기분이었다.
로미가 울면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나를 짓누르는 힘에 대항해 보지만 그럴수록 몸은 돌처럼 더 굳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나를 놓아 달라고 소리 질러 울부짖어 보지만 고요할 뿐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아등바등해 보지만 그저 땀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로미가 나의 곁으로 다가와 눈물을 훌쩍인다.
"엄마......!"
나는 눈을 감고 있는데 울고 있는 로미가 보인다.
"엄마......!"
절망 그 자체였다. 나의 옆에 로미가 이렇게 있는데 안아주지도 못하다니. 이렇게 울고 있는 나의 딸의 눈물을 닦아 줄 수가 없다니! 로미가 안아 달라며 손을 앞으로 내밀며 울고 있는데 나의 몸은 점점 더 굳어가는 듯했으며 쇠사슬이 오랏줄이 되어 온몸을 조여 오는 듯했다. 괴성을 지르며 발악을 해보지만 쉰소리만 헥! 헥! 나올 뿐이었다.
고사리 같은 로미의 손톱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울퉁불퉁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로미의 손톱. 그 가여운 손이 하릴없이 허공만 매만질 뿐이었다.
******
나는 다시 대청마루 위에 있었다. 가위에 눌렸다. 폭염에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진짜 쇠사슬이라도 끊은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이렇게 아파도 죽어지지 않는데, 실제로 죽을 때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수돗가로 가서 수돗물을 틀었다. 옷을 입은 채로 머리에 찬 물 한 바가지를 들이부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마저 미안하여 물을 들이부었다. 아무리 부어도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대문 안으로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당황스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뭐야! 또 사람이 있네?
품위 있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이 집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대수롭지 않게 집안을 훑어보았다.
'무슨 상황이지? 저 여자는 뭐야......'
"여기 잡초들 당신이 다 정리한 거야? 오호! 지하수도 제대로 나오고!"
여자는 내게서 바가지를 빼앗아 수돗물을 받더니 옆에 지하수 올리는 펌프에 물을 두어 바가지 들이부었다. 손잡이를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꺽꺽 소리만 낼뿐 물을 끌어올리지는 못 한 것 같았다.
"이건 무리인가 보네......"
그 여자는 아쉬운 듯 펌프 안을 들여다보며 내게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혼자 오신 거예요? 지금 물놀이하는 건가 아니면 샤워?"
"네? 저요?"
"네. 거기요! 여자 혼자서 텐트 치고 지내기에 쉽지 않을 텐데."
40대 후반쯤 되어 보였고, 어깨 닿을 듯한 파마머리가 너무 더워 보였다. 명품을 잘 모르지만 눈에 익은 명품 로고가 차림새 곳곳에서 묻어났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세요?"
"한 달 살기?"
"뭐, 대충......"
" 난, 여기 집주인이에요. 아! 사용료 받은 사람은 아니고. 그쪽이 한 달 살겠다고 돈 보낸 사람은 사기꾼. 나는 여기 집주인. 나는 그 사기꾼과 전혀 모르는 사이. 이해되죠?"
뭔가 석연찮았다. 자신의 집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사기를 쳤다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이시네요! 마치 준비한 대본을 읽듯이."
"그쪽이 세 번째? 네 번째? 그 정도. 뭐, 처음이 아니란 소리예요. 당황스러울 것도 없고."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러니깐! 신고를 안 하는 건지 잡히질 않는 건지. 어떻게 때 되면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는지! 궁이 당황스럽다면 난 이 포인트가 당황스러운 거지. "
"아......."
"사기꾼한테 연락은 해보셨어요?."
"아뇨. 전원이 꺼져 있다고 나와서요."
"하긴. 사기꾼이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으니깐요. 한시라도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어떻게 찾아요?"
"그거야!"
여자는 나를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계약한 사이트 관리자에게 연락을 해보든, 송금한 계좌 은행에 문의를 하든지,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찾아가서."
"그냥 포기할래요."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 제가 워낙 귀찮은 걸 안 좋아해서요. 게을러요. "
"머, 그래요! 다음에 또 다른 피해자가 여기서 짐을 풀고 있겠네요. 귀차니즘이라..... 할 수 없지. 당신 인생이니깐 당신이 알아서 하시고, 저기 짐은 언제쯤 정리가 될까요? "
"왜요?"
"왜...... 라니? 여긴 내 집이고, 내 입장에선 당신은 무단 가택 침입인데.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조용히 짐 빼라고 얘기하는 것도 그나마 사기당한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 인류애를 발산하며 얌전히 말로 짐 빼라고 하는 건데, 고마워 하기는커녕 왜냐고 되려 묻는 당신은 뭐지? 이거 내가 이상한 건가?"
예상치 못한 난제였다. 여자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맞받아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한 곳으로 생전 처음 풀도 베고, 전기 충전기까지 사용하며 사수했는데 나가야 한다니 아쉬웠다. 무엇보다 갈 곳이 없었다.
"저 죄송하지만, 딱 한 달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안됩니다."
여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단칼에 거절했다.
"제가......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왜 없어요? 왔던 데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게...... 제가 이혼하고 한 푼도 없이 나와서 전재산 털어서 그 사기꾼한테 돈을 보냈거든요.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어요."
"왜? 뭐 잘 못하고 이혼당했어요?"
"아니...... 당한 게 아니라 한 건데......"
"아니 무슨 대단한 잘못을 했길래?"
"아니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오케이 인정. 알았어요. 무슨 사정이 있겠죠. 이혼당하고 빈털터리로 쫓겨 나온 심정이야 오죽하려고."
"아니, 쫓겨난 건 아닌데......"
"그래, 다 주고 나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을 수 있지. 뺏겼든 줬든 그지꼴로 나온 건 매한가지고만. 아휴! 뭐가 중요해!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데!"
무례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너그럽게 제 사정 좀 봐주시길 바랍니다."
"음. 초면에 사람 참 곤란하게 만드네."
내심, 이렇게까지 사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어차피 계속 볼 사람도 아니니 한 번 정도 고개 숙이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폐가라 비어 있는 집인데 집주인이라지만 너무 거들먹거리는 것 같았다.
"뭐, 그래요. 할 수 없지 머. 운이 좋으시네요. 네가 강무 약약이라서 그쪽 사정을 매몰차게 외면할 수가 없네요. 좋아요. 일단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세요."
"어쨌거나 사정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또 한 번 고비를 넘겼다.
"감사까진 좀 부담스럽고. 그러면...... 난 방을 써야겠네. 이 방도 청소 해놨어요? 혹시?"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여자는 양 옆 방문을 열어 살펴보았다.
"그냥 일단 이 방을 써야겠다!"
"저, 여기서 지낸다고요?"
"응. 네! 왜요? "
"저보고 여기서 지내도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그랬지."
"그런데 여기서 지낸다는 말씀은......"
"그대는 거기서 지내. 난 여기 이방에서 지낼 거야."
"그건!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요?"
"불편해? 왜? 남녀 사이도 아니고 그냥 여자끼리 왜? 혹시 성 소수....... 뭐 그런 취향이야? 어머! 그거 숨기고 결혼? 웬일이야. 완전 드라마인데. 들켜서 쫓겨나고? 뭐 그런 히스토리? 풋!"
무례한 사람임이 확실했다. 여자는 농담이랍시고 혼자서만 피식피식 웃어댔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게 아니라요! 혼자 조용히 지내려고 외진 곳까지 찾아온 건데 아무래도 사람이 있으면......"
"걱정하지 마. 엄청 조용해, 내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마저 까먹을 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웃기네. 내가 이런 걸 자기한테 설명해야 해? 여기 내 집인데? 어쨌거나 기생하는 건 그쪽 아니야? 난 아무런 이득 없이 그 전망 좋은 자리를 허락해 줬는데! 거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폿이야."
"아...... 죄송합니다."
"현실 상황을 자주 망각하는 스타일인가 봐? 걱정 마! 죄송할 필요 없어요. 다행히 난 나쁜 상활들은 금방 지워버리는 성격이니깐! 옷이나 갈아입어! 아무리 날 더워도 그러고 있으며 감기 걸려!"
여자는 들고 온 원터치 텐트를 방안에 던졌다. 그 안으로 가지고 온 짐들을 들여놓았다.
젖은 옷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나의 의자로 돌아왔다. 손만 대충 닦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로티야, 정말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너무너무 피곤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애초에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너무 즉흥적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 같다.
내 삶을 시한부로 정한다는 것부터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 것이었을까! 죽을 용기도, 제대로 살아낼 자신도 없었던 내가 자발적 시한부니 뭐니 하는 가장 유치한 방법을 이용하여 나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어머! 이거 라면 먹어도 되는 건가?"
어느덧 여자는 내 공간까지 들어와 버렸다.
"내가 너무 갑자기 오는 바람에 마트를 못 들렀어. 안 그래도 저녁을 어쩌나 싶었는데, 근데 설마 한 달 식량이 이게 다는 아니지?"
난 대꾸하지 않았다. 여자는 나의 짐들을 훑어보더니 혼자서 끄덕끄덕 거렸다.
"옆에 인형은 뭐야?"
"로티예요. 제 애착인형!"
"와우!"
여자는 표정을 숨기려고 애썼지만 이미 나를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자는 감정이 시시각각으로 표정에 드러났다.
"로티야 인사해야지. 여기서 지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지. 그래야 착한 로티지."
여자는 쓴 약초를 씹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여자의 표정을 보니 소심했지만 통쾌했다.
******
잠시 후 여자는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자연스럽게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부었다. 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함께 먹겠냐는 예의상의 물음도 없었다. 여자는 오롯하게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을 챙겨 한쪽 기둥에 등에 등을 대고 대고 가만히 산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번지고 있어서일까, 여자의 표정이 참 쓸쓸해 보였다. 초점 없는 시선이, 산 아래를 향한 표정이 좀 전에 본 느낌과는 매우 대조되었다.
"라면 불겠어요."
여전히 먹는 둥 마는 둥 정말 맛없게 먹는 모습이었다.
"무슨 라면을 그렇게 고독하게 먹어요?"
여자는 급변한 표정으로 피식거렸다.
"그런 걸 고독이라고 하나보구나. 그냥...... 불어서 맛이 없나, 원래 맛이 없는 라면일까, 왜 하필 라면 강국에서 이런 라면을 선택했을까, 뭐 대충 그런 생각하느라. 생각이 깊어 보였나 보구나."
잠깐이었지만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라도 신경을 두었던 마음의 낭비가 억울했다.
담배를 하나 물었다.
"담배 펴? 난 담배 냄새 싫은데."
"죄송해요."
나는 다시 담배를 내려놓았다.
"아니야, 그냥 펴. 대신 불씨 조심하고. 아차 하는 순간에 산불로 이어지는 거야. 특히 요기 소나무에 담배빵 나면 안 돼. 소나무는 기름이 있어서 불 엄청 잘 붙으니깐 특별히 조심해 줘."
"네."
여자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제법 있었다. 노을이 옅어지고 어둠이 덮일 때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소주도 한 병 만......"
"네. 가져가세요
"고마워! 조만간 마트 가면 갚을게."
여자는 그렇게 자기 공간으로 갔다.
나는 여자가 가고 나서도 밤이 온전히 내릴 때까지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상황들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 밤이 되니 근거리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밤에도 잠들면서 짐승 소리에 웅크리지 않아도 괜찮을 듯했다.
가만히 의자에 기대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다. 한 차례 고된 운동을 마치고 난 뒤의 컨디션 같았다.
고된 몸에 집중한다. 한 참 있다 보면 모든 밝음이 사라지면서 어둠 속에서 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서서히 서서히 숱하게 많아진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별 하나 우리 로미의 것으로 해 주세요. 외롭지 않게 항상 떼로 이동하며 빛나게 해 주세요. 그중에서 가장 찬란한 별, 어디서든 내가 찾아낼 수 있게, 그렇게 계속 나의 주위에 머물게 해 주세요."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갔다.
******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인가 싶어 텐트 밖을 살짝 내다보면 창고 물건이 반 이상은 밖으로 나와 있고, 여자는 대문 밖을 왔다 갔다 분주해 보였다. 그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일어난 거야? 덥지도 않니?"
여자는 수돗물을 틀었다. 종아리와 팔뚝에 물어 부어 가며 열을 식히고 있었다. 바가지로 펌프에 또 물을 붓고 손잡이를 움직여본다. 어제처럼 쇳소리만 날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텐트 지퍼를 닫고 다시 누웠다. 잠이 깨고 나서야 텐트 안이 무지하게 덥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밖으로 나가서 아는 척을 해야 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나는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아침부터 뭐 하시는 거예요?"
"아침이라니, 시골에서 이 시간은 벌써 노동 한 타임 끝냈을 시간이야. 자긴 시골에서 안 살아봤어?"
"네, 뭐......"
"하루를 살아도 좀 이쁘게 하고 살아야지, 리모델링 좀 하고 있었어."
"네? 그런 걸 어떻게 혼자서..... "
"요즘 트렌드잖아."
"굳이...... 지금 왜....... 저 가고 나면 하셔도......"
"그렇게 말하면 경치 좋은 자리 무상으로 렌트해 주는 집주인이 너무 섭섭하겠지?"
"아......"
"심심하면 같이 해도 돼! 이런 경험 어디서 해보겠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와달라는 뜻의 표현이겠거니 했지만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제 잠시 안면을 마주했을 뿐인데,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스스럼이 없이 대하는 것 같았다. 전혀 달갑지 않은 친근감이었으며, 주변의 분주함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자기 일루 와볼래?"
내게 손짓하며 대문 밖으로 유인했다.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억지로 대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대문밖이 깨끗해졌다. 집을 둘러싸고 있던 무성한 잡풀들이 사라졌다. 시야를 가리던 풀들이 제거되자 언덕 아래 개울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걸 혼자서 다 하신 거예요? 언제 이걸......"
"응. 이 대단한 걸 내가 했어! 혼자서!"
내가 처음 이 집으로 와서 마당의 잡풀을 제거했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엄청 잘 정돈하셨네요. 원래 이런 일 하셨어요?"
"아니, 첨이야. 나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취미로도 해볼 기회가 없었어."
"소질 있으시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그냥 풀만 벤 것이 아니라, 대문에서 개울까지 내려가는 길은 풀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선으로 구분시켜 놓았다. 담벼락 쪽으로는 가지런하게 돌을 두어 화단도 만들었다.
"그러게, 소질 있나 봐. 내 취향 아니라서 화초도 안 키워 봤거든!"
여자는 큰 봉지에 제거된 잡풀들을 긁어모아 담으며 계속 말을 했다.
"여긴 우리 아빠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야. 아빠도 중학교 땐가 서울로 유학 오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만 지내셨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빠에겐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던 거지."
나 역시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할머니와 사이가 각별했으며, 따뜻한 추억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 집이 내게도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서서 그러고만 있을 거야? 엄청 바쁜 거 아니면 이것 좀 도와주지?"
나는 얼떨결에 봉지를 잡아주었다. 잡풀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가했다. 하루 종일 여자와 나는 집 주변을 정리했다. 개울가 주변 역시 잡풀은 베어버리고 개울 안에 있던 작고 이쁜 돌들을 골라 주어 개울 주변선을 정돈했다. 처음 왔을 때랑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풀만 정리했을 뿐인데 제법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정갈했다.
우리는 녹초가 되어 마루에 쓰러져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라면을 먹을 힘조차 없었다. 여자는 컵라면을 만지작만지작 하더니 영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자기야, 밥 먹으러 나갈까? 라면으로 안 되겠지?"
"밥 보다 목욕이 너무 하고 싶어요."
"목욕? 여기서 하면 되잖아. 수돗물 콸콸 나오던데."
"너무 다 보여서요."
"머 어때 우리밖에 없는데? 됐고, 알았으니깐 읍내 나가서 뭐라도 좀 먹고 오자."
여자는 나를 끌고 가다시피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