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10 장미정원

by 늘품이

바쁜 상활 속으로 준비 없이 떠밀린 기분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보다 훨씬 많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하늘의 별을 마주하며 담배를 태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휴식을 취했다.


"뭐 하니?"


"그냥 쉬고 있어요."


언니가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진정이 된 것인지, 아님 또 다른 인격이 나오는 것이지.


단순하게 감정기복이 심한 게 아니라 다중인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인격은 평온한 정상인의 모습 같았다. 표정부터 이미 달랐다.


언니는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본인 역시 에너지 소비가 컸는지 많이 지쳐 보였다.


"그 자리 진짜 좋은 거 같애, 의자 남는 거 없어? 차마 인형에게 자리 좀 양보해 달라고 하긴 좀 그렇고!"


난 로티를 안아 내 앞에 두고 , 언니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냥 앉아요."


"로티야, 미안해!"


"풋! 언니까지 그럴 필요 없어요. 웃기지 않아요? 어른이 인형을 의인화하는 거?"


"안 웃겨, 난 괜찮아. 남이 볼까 겁나서 그러지. 여기서 나랑 있을 때는 괜찮아. 여기선 로티는 나에게도 너에게 같은 거야."


이 사람은 밀당의 고수 같다. 다양한 인격으로 반전과 반전의 모습으로 화를, 때론 뭉클함을 교차로 발생시켰다.


"달달한 믹스 커피가 생각나네요."


"나의 멘트가?"


"크크크. 아니요 마시고 싶다구요."


"커피 좋아해?"


"좋아하는 건 아닌데, 없으니깐 아쉽네요. 시원하게 해서 먹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얼음이 없구나!"


"부엌에 냉장고 있잖아!"


"사용되는 거예요?"


"글쎄, 되지 않을까?"


여자는 자신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만끽했다.


********


이른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였다. 텐트 안은 영락없는 한증막 같아서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땀을 닦으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나오자마자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컵을 내밀었다.


"뭐예요?"


"뭐긴. 냉커피 먹고 싶다며!"


"아니, 갑자기 어떻게......"


"냉장고는 어젯밤에 너 잘 때 깨끗이 청소했고, 물 넣고 잤더니 아침엔 잘 얼어있더라고. 운 좋게도 내 캐리어에 예전 베트남 여행 때 샀던 믹스커피가 서너 개 있었고."


"와...... "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었다. 냉큼 커피를 받아 한 입 들이켰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시원하고 맛있었다. 공복 커피가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단 말인가. 오아시스의 가치는 사막 때문이다. 이 한잔의 커피는 정말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언니를 지인으로 둔다는 행복이 이런거였군여. 언니 건 없어요? 이거 같이 마셔요!"


"수돗물 얼려서 한 거라! 너 먹고 배탈 나지 않으면 그때 먹으려고. 수질 오염도 정도도 모르고 해서."


저런 식의 화법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 유리잔에 카피를 반을 담아 언니에게 주었다.


" 뭐야? 양 얼마나 된다고......"


"혼자 죽을 순 없죠."


"그런 거야? 오오오! 우리 지원이가 변했어요!"


우리는 나란히 앉아 믹스 냉커피를 마시며 날씨를 만끽했다. 무지하게 더웠지만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지원아! 여기 어닝이라도 설치해야겠어. 10년 묵은 기미까지 싹 올라오겠는데?"


햇볕의 뜨거운 열기와 눈부심으로 얼마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일단은 차로 가서 타프를 챙겨 왔다.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어서 서툴렀지만, 얼추 모양은 그럴싸하게 햇볕을 가릴 정도는 되었다.


"뭐야! 근사하네. 진즉에 좀 하지. 이따 가서 믹스커피 한 박스 사 와야겠네."


다시 나란히 의자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땀이 흐르긴 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여유롭게 한가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차양만 했을 뿐인데 효과가 제법 괜찮았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이곳의 풍경과 공기, 그리고 언니에게 적응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지원아, 배 안 고파?"


"배고파요? 컵라면 먹을래요?"


오늘따라 유난히 말도 없었고, 부지런 떨며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평소랑은 달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누구? 나?"


"오늘따라 아무것도 안 하고, 말도 많이 안 하고..... 낯설어서요.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민까지는 아니고! 니 생각엔, 빨강 파랑 노랑으로 몇 가지 색을 만들 수 있을까?


"신호등 색이네요. 주황, 초록, 그리고 또 뭐가 있으려나."


"흠. 분명히 더 많은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갑자기 그건 왜요?"


"오늘은! 외벽 페인트칠을 할 거야. 근데 내가 페인트 색이 3가지밖에 없어서 어떻게 해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야. 콘셉트를 못 잡았어. 그 3가지 색으로 어떤 외벽을 표현해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으로 괜한 마음을 썼구나 싶었다. 지금의 이 걱정과 이 질문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믹스 냉커피는 전조였다. 엄청난 노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니는 구상이 끝났다면서, 자신의 지프차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페이트와 롤러, 붓 등 네댓 개의 장비들을 챙겨 왔다. 별다른 의지 없이 언니의 지시대로 장비를 들고 움직였다.


******


지붕의 낡은 기와는 주황으로 변해갔고, 양쪽 외벽은 황토색으로 변해갔다. 정면은 본인이 직접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여, 나는 집 주변의 화단과 텃밭을 정리했다. 며칠만 내버려 두어도 꽃과 채소는 쑥쑥 자랐고 더불어 쑥쑥 자라난 잡초들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 언니가 서비스로 받은 씨앗을 여기저기 뿌렸던 터라 들꽃도 듬성듬성 보였다.


"지원아! 이리 와봐. 완성했어!"


대문이 있는 정면의 벽에는 신호등과 횡단보도를 그려 놓았다. 기대치가 없었음에도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안 그리는 것이 심플하고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색 때문에 신호등은 알겠고, 옆에 그게 횡단보도를 그린 건가요?"


"내가 제대로 표현했나 보구나. 신호등 3색으로 심호등을 그리는 게 근본이지! 신호등은 너무 많은 의미가 있잖아! 우리에게 갈 때와 멈출 때를 안내해 주는 그런 의미이지!"


"횡단보도는 그럼 신호등 있으니깐 세트로 그린 거예요?"


"에이! 눈치 빠르네. 횡단보도에도 어떤 의미를 하나 만들어 붙여놔야지. 어때? 멋있지?"


"네, 그럴듯해요."


솔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림이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좋은 작품이 될 수도, 형편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므로!


"너무 프로가 그린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


"딱 초등학생 수준 정도니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언니는 민망한 걱정을 하면서 남은 벽 쪽에 "ROSE GARDEN" 적었다.


"괜찮니? 설마 철자 틀린 건 아니겠지?"


"로즈가든이 뭐예요?"


"우리 상호명!"


"맙소사! 차라리 장미정원이 낫겠어요. "


"로즈가든이나 장미 정원이나, 뭐가 달라?"


"로즈라는 말 자체가 너무 구리지 않아요?"


"세상에! 구리다고? 어쩜 그런 저급한 표현을! 너와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이미 적었는데 어째! 낙장 불입이야."


"낙장 불입...... 참 고급 진 표현이네요!"


"몰라 몰라. 되돌아갈 수 없어. 이제 지붕만 마저 하면 완성이다!"


"지붕 한다고 올라갔었잖아요. 아까 끝낸 거 아니었어요?"


"앞부분만 했지. 말라야 밟고 안쪽까지 칠 할 수 있거든. 지금쯤 말랐을 거야."


"아니, 안쪽부터 칠을 하면서 밖으로 나와야지! 왜 일을......"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사다리를 고쳐 자리 잡았다. 어쩔 수 없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낡았는데, 우리 둘 다 올라갔다가 무너지면 어떡하죠?"


"무너지면 보험 청구해야지.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어! 서두르자 해 떨어지기 전에 완성하자고!"


생각보다 많이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늘 바라보던 산의 각도가 달라지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잠시 산의 모습에 빠져 있을 때, 비탈길 아래로 그 라면 도둑놈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형체만 가늠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얼굴보다는 그놈의 실루엣이 내겐 더 각인되어 있었다.


"어! 저기! 언니! 그놈이에요. 라면 도둑!"


"진짜? 어디? 확실해?"


"네 그런 것 같아요."


언니는 사다리를 타고 급하게 내려갔다.


"야, 빨리 내려와!"


********


얼떨결에 언니를 따라나섰다. 비탈길로 가로질러 다행히 그놈 뒤를 따라붙을 수 있었다. 언니는 놈의 근거지를 알아둬야 한다며 필사적으로 미행을 감행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미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놈은 천천히 강이지 풀 따위를 꺾으며 걸어갔다.


그때의 긴장이 떠오르기도 했고 조금은 두려웠다. 언니는 미행이 능숙해 보였다. 주저함이 없이 속도를 조절하며 상대가 느끼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잘 따라붙었다.


그놈은 산길을 따라가다가 산책로를 벗어나 산길로 둘러 갔다. 다행히 경사가 없어서 길이 험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갔을 때였나, 맙소사! 정말로 동굴이 있었고 그 앞에는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그놈 맞아? 확실해?"


"네. 맞아요. 그때 어디 사냐고 물어보니깐 동굴에 산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었나 봐요."


"이상하네, 저런데 신원이 분명하다고? 하여간 거주지 알았으니깐 당분간 감시 좀 해야겠어!"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의 그놈은 전부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헛소리였던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 그때 달빛에 비친 것은 정말 눈물이었을까!


*******


집으로 돌아온 후 하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의자에 나란히 앉아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이거 의자 엄청 편하네. 잠도 솔솔 오겠는데, 여기 자리가 정말 명당이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음 세상 근심 걱정이 사라지겠네."


"처음 여기 와서 사기당했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는데, 여기서 보이는 이 배경 때문에 모든 막막함이 사라졌죠."


"지원이는 캠핑 좋아해?"


"그다지.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런데 장비들은 제법 갖추고 있는 것 같은데."


시 머뭇거렸다.


"딸아이가 캠핑을 엄청 가고 싶어 했는데, 못 가봤어요. 장비는 하나둘씩 마련했는데 한 번도 가본진 못했어요."


뭐였을까,

내가 로미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드러내다니...... 드러내긴 했지만 막상 로미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라는 겁이 덜컥 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할지. 아니 내가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렇구나. 이젠 너에 대해서 완전히 알 것 같다."


"나에 대해서요?"


"응. 집도 절도 없고, 딸아이가 한 명 있고. 혹은 있었고. 인형을 품고 있어야 할 만큼 가슴에 큰 구멍이 있고. 텐트는 있지만 캠핑은 관심 없고. 세상에서 본인이 사라지길 바라고. 맞지?"


모두가 맞는 말이었다. 아주 간결하게 지금의 나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니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말 안 했나? 난 남다른 통찰력이 있어. 넌 그런 능력 없어? 이 언니를 통찰해 보거라!"


"난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있는 그대로 해봐. 생각나는 그대로."


"음...... 언니는 아빠가 있었고, 할머니가 있었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그게 다야?"


"그리고...... 통찰력이 좋다!"


언니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언니에 대해 특별히 하나 가르쳐 주겠어. 너에게 로티가 있다면 나에겐 이 소나무가 있어."


나는 박수로 맞장구치며 알은척을 했다.


"맞다! 이거 내가 처음부터 눈치챘어요. 여기에 있는 여느 나무들과는 다르다는 것! 이거 언니의 손길이 가득한 소나무 맞죠?"


"아이고! 대단한 걸 눈치채셨네요!"


나의 반응이 너무 호들갑스러웠는지, 언니는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나는 머쓱함에 애꿎은 로티의 귀만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소나무가 언니에겐 로티 같은 존재라고 했다. 내 가슴의 구멍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언니는 나의 어떤 것에서 가슴의 구멍을 찾아낸 것일까. 언니에게 가슴의 구멍은 무엇일까......


늦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생각이 깊어진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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