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정원 22-1
씻지도 않은 채 자리에 누웠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언니의 분주함이 계속 신경 쓰였다.
'도대체 자기가 왜 저렇게 신경을 쓰는 거야?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거참 거슬리네.'
무거운 것은 머리일까, 마음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유난히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기분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으며 졸리지 않은데 눈은 감겼다.
'정범이 그런 사람이든 아니든 나와 무슨 상관이람? 준영이는 부모가 있는데 굳이 왜, 나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잖아.'
그러나 준영이 표정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자니 그 표정이 더 선명해지는 듯했다. 엄마와 아빠가 옆에 있음에도 혼자인 것처럼, 그 어린 몸으로 혼자서 오롯하게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애가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있는데 부모라는 사람이 왜 옆에서 애를 돌보지 않지?'
결국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언니 가 봅시다!"
"응? 어딜?"
"정범이네 동굴을 가든, 경찰서를 가든!"
"응? 갑자기?"
"언니 가려고 했던 곳으로 가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과는 다르게 언니는 막상 나의 동참에 주춤하는 듯했다. 차에 오르긴 했지만 시원스럽게 앞장서지 못했다. 그렇게 시동만 켠 채로 얼마나 있었을까.
"뭐예요!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 것처럼 굴더니."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급하게 다가옴을 느꼈다. 언니와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는데 보니 정범 씨였다.
"아씨! 깜짝이야! 조범이 너 뭔데!"
"언니들......"
"아씨! 깜짝이야! 조범이 너 뭔데!"
정범은 숨을 헐떡 거리며 땀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뭐야? 여태 도망 다닌 거야, 뭐야?"
"헉, 헉! 저...... 컵라면이라도 좀 있을까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미친 애가 또 미친 거야?"
****************
자초지종도 듣지 못한 채 우리는 정범이 라면 먹는 모습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초리가 부담스러울 법도 했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범은 허기가 많이 졌는지 아무 말 없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컵라면 먹는 모습이 어찌나 게걸스럽던지 안쓰러워 보였다.
'도대체 넌 누구니?'
허우대 멀쩡한 젊은 나이에 가족도 없이 혼자서, 노숙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늘 진실한 눈빛으로 거짓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까 너 봤어, 도망친 거 맞지? 준영이랑 뭐 있는 거 맞지? 너 때문에 경찰들이 와서 준영이 보호하려고 데리고 간 거지? 안 그러면 도망칠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미친 척하고 순진척 하면서 못된 짓 하고. 통찰력 있는 나를 의심쟁이로 만들고, 맞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지?"
언니는 정범에게 다그치듯 질문을 쏟아부었다. 물론 정범은 어느 질문에도 답변 없이 라면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아니, 왜 여태 너 하나 못 잡은 거야? 아주 여기 지구대는 정말 문제가 심각하고만. 조범이! 대답 안 할 거야? 내 인내심은 라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만이다!"
정범은 다 비운 컵라면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렇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먹는데 흐름 끊길까 봐 대꾸하지 못했어요."
"네! 더럽게 친절한 이유 감사드리고요! 이제 그럼 진짜 답변을 좀 해봐."
"네! 질문해 주세요. 궁금한 게 뭐예요?"
"야!"
언니는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정범 씨. 준영이네 집으로 경찰차가 왔어요."
"보셨구나......"
"하필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근처에서 도망치듯 반대 방향으로 뜀박질하는 정범 씨도 봤고요. 언니는, 아니 우리는 그 모습이 마치 준영이네서 도망치는 모습처럼 보이니깐...... 일전에 일도 있었고...... 도망 맞나요"
"네."
다소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언니의 추리가 맞다는 말인가! 나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본인도 정작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 조범이 네가 무슨 짓을 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마침 엄마가 있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을 것이고. 너는 그래서 도망을 쳤을 것이고."
"우와! 그렇게 생각하고 제가 도망을 쳤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이건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첫 번째로 추리할 수 있는 상황이지. 넌 전적도 있으니깐!"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추리를 잘하는 사람이 진짜 아이큐가 높은 거라고 하던데..... 음 알겠네요. 일단! 틀리셨어요. 제가 신고당한 게 아니고 신고를 한 거예요!"
"야! 거짓말을 하려면 좀 성의를 보여라. 적어도 말이라면 앞뒤가 맞아야지! 그리고 뭐? 아이큐가 어찌 고어째?"
"거짓말 아니에요. 여느 때처럼 준영이 잘 지내고 있나 슬며시 들여다보는데, 엄마한테 엄청 두들겨 맞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신고를 한 거예요."
"맞다니요? 준영이가 엄마한테 맞았다고요? 아니 왜요?"
"직접 본건 아니지만 어찌나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애를 잡던지. 준영이가 악! 악! 하면서 비명을 지르며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말도 안 돼......"
"정말이야? 확실한 거야? 자세히 얘기해 봐."
"저녁에 일 일찍 끝나면 종종 준영이네 집 쪽으로 지나다가 불 켜져 있으면 잠시 잘 지내고 있는지 머물러 있다가 와요. 밖에서 대충 집 안 소리만 들어도 집 안 분위기를 알 수 있으니깐요. 그러다가 준영이가 당하는 소리를 들은 거예요. 너무 놀란 나머지 112에 신고를 하고 당장 달려 들어갔어요."
"정말... 준영이가 엄마한테 맞고 있었던 거야?"
"엄마는 마귀처럼 얼굴이 막 붉으락푸르락거렸고 준영이는 위에 옷을 안 입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깨며 등이며 멍이 들어 있지 뭡니까. 당장 데리고 나오려고 했는데."
"이거 정말 다 맞는 소리야?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믿어야 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언니는 정범의 말을 듣고 미심쩍어했다. 왜 아니겠는가, 나 역시 어리둥절했다. 언제나 그렇듯 정범은 모든 이야기를 진짜처럼 하는 바람에 진실 여부의 판단이 쉽지 않았다.
"네가....... 신고했는데 왜 네가 도망을 가? 우리를 물로 보는구먼!"
"놀라서 준영이를 데리고 나오려는데 준영이 손을 잡았는데 준영이가 손을 뿌리치더라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마치 준영이 눈빛을 보니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싶은 생각도 들고. 나보고 준영이가......"
"준영이가 뭐?"
"꺼지라고."
"엥? 말도 안 돼."
"그런 눈빛이었어요.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조범이 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전 그냥 물어보니깐 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에요. 전부 사실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서 혼자 나올 수가 있냐고!"
"그럼 어떻게 해요! 준영이가 날 바라보는 눈빛에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요? 눈빛으로 분명히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했으니깐 경찰을 믿고 거길 피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찌나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던지, 기력이 다할 때까지 달렸어요. 그냥 그때 그 컵라면이 생각났어요. 마음에 허기가 졌다고나 할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거짓말은 아닐 텐데, 진실도 아닌 것 같은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상황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경찰차에 오르던 준영이의 표정을 생각한다면 정범의 이야기가 영 터무니없지만은 않았다.
"준영이를 감시했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