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이십 년 전.
나는 관 같은 고시원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사 온 먹다 남은 떡볶이와 튀김은 나무젓가락과 함께 봉투에 남아 있다. 소스가 흘러서 책상 위에 반쯤 굳어 있다.
손바닥 만한 창문 사이로 햇빛 한줄기가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하지만 고시원 안은 깜깜한 밤이다. 내 옆방 이웃은 아직 잠들어 있는지 코 고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강약강약 들려온다. 코 고는 소리가 멈추면 작은 라디오 소리가 시작될 것이다.
담배연기를 맡으며 500cc 얼음 잔과 3000cc 호프통을 서빙하면서 밤부터 새벽까지 알바를 마친 나는 손목이 아직 시큰 거린다.
며칠 전 고시원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려고 옷을 다 벗었을 때쯤 샤워 장 빈 공간 위로 남자 머리카락이 쓱 올라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게 놀란 뒤로는 샤워하기가 겁이 난다.
어제도 알바를 마치고 온몸에 담배연기가 벤 채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책을 편다. 제목은 ‘긍정의 심리학‘
글을 몇 줄 읽지만 집중이 잘 안 된다.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몸에선 늦게까지 자도 풀리지 않는 피곤이 몸에 늘러 붙은 데다 내 옷에선 담배 냄새까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한다.
긍정하라고!!
뭘 긍정하라는 거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네가 나에게 긍정하라는 거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미국작가에게 짜증을 한 껏 내어본다. 옆에 있다면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어로 반말로 대꾸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고시원을 알아? 어?! 네가 알바로 80만 원 벌어서 떡볶이로 저녁을 때워 먹는 내 상황을 아냐고?
뭘 긍정하라는 거야 어떻게 긍정하라는 거야!”
또 한 번 상상의 미국작가 앞에서 반말로 소리를 지른다.
발냄새가 진동하고 뒹굴거리는 운동화가 쌓여있는 공용 신발장에서 내 신발을 겨우 찾아 건물 밖을 나온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오늘 난 뭔가를 하고 싶다.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향한 나는 군중 속을 걷는다. 옷을 하나 사고 싶다.
만원 하는 티셔츠를 몇 개나 비교하며 골라본다 그리고 멋진 스팽글로 쓰인 롤링스톤즈 티셔츠를 하나 고른다. 만원 같지 않은 만 원짜리 티셔츠에 만족한다.
하나뿐인 휴일에 시내까지 나와 옷도 샀지만 왠지 마음이 허전해진다. 돈을 내고 옷을 가질 때 잠시 행복했는데 여전히 허전하고 외로운 내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
배도 고프다.
음식점을 찾아 걷던 나는 “햄버서세트증정 헌혈 급구“사인을 본다.
햄버거증정권을 준다고? 헌혈만 하면?
담배꽁초와 침으로 범벅된 어두운 코너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헌혈의 집으로 올라간다.
입구와는 달리 헌혈의 집은 병원 무균실 같다. 바늘과 의료장비를 보니 다시 나가고 싶은 심정도 든다.
심박을 재고 검진을 하고 혈액형 검사를 하고 의자에 눕는다.
고무줄로 팔을 세게 묶은 선생님은 주먹을 쥐었다 펴라고 한다. 대바늘이 팔에 꽂히려는 찰나 머리를 얖으로 돌려 눈을 질끈 감는다.
너무나 붉어 검기까지 한 나의 피가 혈액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나는 갑자기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이게 끝나면 햄버거를 먹으면 돼” 나는 생각한다.
…
이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또 헌혈의 집에 누워 있다.
영화티켓, 여행샴푸린스세트, 햄버거상품권 선물 원하지 않음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안내판을 들고서
멋지게 선물 원하지 않음을 고를까? 잠시 고민을 한다 하지만 최근 출시된 영화가 생각난다. 그래 선물인데 뭘. 무료영화 티켓을 선물로 선택한다. 눈을 들어 보니 헌혈증을 기부함이 보인다. 그래 내 헌혈증은 잘 쓰일 수 있게 기부하고 가자.
소중한 투표함에 투표를 하듯 헌혈증을 꽂아 넣는다 나의 피가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이기를 기도하면서
좋은 일은 한 것 같아 마음이 부푼 나는 느닷없이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넘쳐나는 나의 붉은 피는 아픈 사람의 몸에 들어가 흐르게 될 것이고
그럼 그 피는
골목에서 담배 피우는 중학생들을 보면 주먹을 불끈하게 만들 것이다.
나이 많다고 반말하며 무시하는 아저씨를 보면 눈을 부라리며 말대답을 또박또박하게 될 것이고.
어디 새치기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 단어씩 끊어 저! 기! 요 뭐 하시는 거에욧? 하고 불러 세울지도 모른다.
가끔은 미친 듯한 식욕이 생기게 할지도 모를 알이다.
병원식 2인분을 클리어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병원 둘레를 뛰고 싶게 만들지도 모른다.
어떤 혈액 주머니를 선택할지 선택권 없이 내 피를 받은 사람에게 미안해진다.
갑자기 이유도 모르고 파이터처럼 변한 자신이 혼란스러워지겠지만
파이터처럼 병과 싸워 주길 바라본다.
헌혈을 마치고 나 오는 길.
항상 디폴트값으로 정해진 듯 나의 내면에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초라하고 실패자 같은 내 자아가 나에게 빈정거린다.
“헌혈 한 번 했다고 뭐 나라를 구한 것 같냐?
주위사람들한테는 잘해주지도 않고
이제 40이나 되고도 뭐하나 딱히 이뤄 놓은 것도 없는 주제에 뭘 헌혈까지 해?
너 그거 영화티켓 공짜로 받으려고 한 거냐, 너 좀 찌질하다“
나의 또 다른 자아는 갑자기 빡친다.
날을 잔뜩 세운 목소리로 대꾸한다.
뭐? 찌질하다고? 너 말 좀 심하다!
그래 뭐 나 딱히 이뤄놓은 것 없고, 주위사람들한테 잘해 주지도 못해. 그래 그건 인정!
그렇다고 뭐 나는 헌혈도 못하냐?
그리고 나! 아직 어리거든! 40밖에 안 됐거든.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거든!
혼자 씩씩거리는 내 곁으로
꽃무늬 고무줄 바지를 입은 할머니가 지나간다.
그리고 핸드폰이 신나게 울린다. 야 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