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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기록하고 예술이 기억하는 앨리스 현

연극 <아들에게: (부제 미옥 앨리스 현)>

by 아르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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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22일, 멀어지는 제물포항을 바라보는 121명의 시선.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간판이 뒤섞인 조선의 관문이 그들을 배웅하는 광경을 짐작해 본다. 굶주림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는 개릭호. 무게 중심이 선미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다가 복원되는 시간.


이렇게 이민의 역사는 선을 긋는다. 1개월 급여 16달러 모집 광고를 보고 승선했던 이들은 날 밝으면 사탕수수 농장에서 10시간 노동을 견뎌야 했다. 악착같이 뿌리를 내린 하와이 이민자가 15만 달러 기금을 조성하여 고국의 학교 설립에 보태는데 그곳이 인하대학교다.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 자가 만나는 순간.


개교 연도가 1954년, 앨리스 현이 죽은 이듬해다. 그가 누구냐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다. 엄마 뱃속에서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리고 잊힌 독립운동가다.


극단 ‘미인’이 무대에 올린 <아들에게(부제: 미옥 앨리스 현)>은 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낭독 공연으로 출항, 2024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초연에 이어 올해 3월 같은 공연장에서 재연으로 기항한 연극.


1953년 함경북도 청진 해안에서 앨리스가 숙청당하면서 극은 물음표를 달고 과거로 거슬러 오른다. 사탕수수 농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의문과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현순의 사상이 스며들어 자연스레 공산주의자로 성장한 앨리스. 사회 곳곳에 만연한 여성 인권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미국, 러시아까지 오가던 열정 가득한 독립운동가의 운명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쪽으로 기울어진다.


고국의 남쪽과 미국에서는 배격해야 하는 공산주의자요, 월북했더니 권력을 잡은 집단에 의해 미국 간첩 취급받는다. 북한행을 함께하지 못한 아들 웰링턴은 프라하에서 무기한 체류하는 신세, 낙인찍혀 미국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삶을 살아내야 했으므로(웰링턴의 대사)’ 냉전 체제의 감시 대상자일지언정 자신의 꿈을 일구기 위해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이국인 여인과 가정을 꾸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감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만다.


시대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조명한 정병준의 저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극작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연출가 김수희(필명 구두리)에 의해 다시 태어난 인물은 생생했고 앨리스로 분한 우미화는 신념에 불을 댕기는 연기를 선보였다. 170여 분 러닝타임 동안 종횡무진하는 강철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의 상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박기자. 앨리스를 인터뷰하면서 건져 올린 과거 속에 함께 드나들었다.


머잖아 관객은 알아챌 수밖에 없다. 박기자(김하람 분)라는 허울로 감춘 인물이 바로 웰링턴이었음을. 아들이 엄마의 머릿속을 파헤치고 있음을. 어쩌면 처음부터 엄마는 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그들 앞에서는 시간 또한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1부 공연 막바지, 앨리스의 심장 박동처럼 거세지는 드럼 비트가 인상적이었다. 모든 배우가 하나둘 등장하여 주인공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격렬한 호흡으로 하나의 움직임이 되면서 연주하는 드러머의 모습이 비쳤다. 달리고 달려야지. 두드리고 두드려야지. 조명과의 거리에 따라 무대 배경에서 커졌다 작아지는, 하이그로시 바닥에도 그려지는 인영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정지용의 시 ‘향수’가 대중의 가슴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었던 까닭은 테너 박인수를 찾아간 이동원 덕분이다. 월북(또는 납북)했다는 사유로 그늘에 가려졌던 시인의 문학은 올림픽을 앞둔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 이듬해 김희갑에 의해 음표가 붙은 시어는 두 가수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국내 최초의 크로스오버 음악이 출항하더니, 존 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가 함께 부른 ‘Perhaps Love’처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긴 항로를 그렸다.


기록과 삭제의 갈림길. 권력이 삭제한 이름을 훗날 역사가 기록하리라. 예술이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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