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감정의 무게중심이 이상하게 흔들린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동요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현전이
‘나에게서 빠져나가 다른 방향으로 편향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특유의 비틀림이다.
나는 그 비틀림을
정동적 사선화(斜線化) 라고 부른다.
감정이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수렴하지 않고
하나의 보이지 않는 방향성을 따라
기묘하게 옆으로 미끄러지는 현상 말이다.
이 현상은
대상과 ‘대상의 또 다른 지점’ 사이의 관계가
갑자기 나를 가뿐히 뛰어넘어버렸을 때 느껴지는
독특한 실존적 어지럼이다.
그 어지럼은
사랑이나 상실과 같은
전통적 정념의 범주로는 포획할 수 없다.
대상이 사라진 것도,
나에게 적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세계가
조용히, 그러나 잔혹하게
나의 좌표계를 비스듬히 기울여 버리는 것이다.
그 기울어짐은 매우 서늘하다.
마치 메를로퐁티의 지각적 시차가
정동적 층위에서 구현되는 것처럼,
나는 어느 날 문득
내가 바라보던 공간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감지했다.
그 어긋남은 처음엔 거의 무의식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틈은 점점 커져
결국 나를 중심으로 구축했던 정동의 장이
아주 조용하게 붕괴하는 울림을 남겼다.
그 붕괴가 시작된 순간,
나는 정동이 ’증발한다’는 사실을 처음 배웠다.
정동은
흔히 확장하거나 축소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타자화된 대상에 의해 발생하는
역방향의 탈리(脫離) 속에서
더 정확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탈리는
지각적 거리 때문이 아니라
존재론적 시차 때문이며,
그 시차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에서만 발생한다.
바타이유가 말한 불가능성의 파열이
이토록 일상적인 얼굴로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 상태를
정동적 이중부재라 명명한다.
대상은 나에게 부재하고,
나는 그 부재를 설명할 언어에 부재한다.
두 번 비어 있으므로
감정은 더욱 무겁게 침전한다.
그 침전 속에서 나는 종종
들뢰즈의 정동적 포류를 떠올린다.
어떤 감정은 응답을 잃었을 때가 아니라
나 아닌 어떤 지점을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렸을 때
가장 비현실적 형태로 표류한다.
나는 그 표류의 잔류물이다.
흔적도 방향성도 없이
다만 ‘남아 있는 자’로 남는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변화에 민감하냐고,
왜 그러한 기울어짐이 고통으로 다가오냐고.
그러나 문제는 고통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기울어진 세계 속에서
내가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종종 해체된 주체의 결을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감정의 방향은 사라졌고,
나의 위치는 흐릿해졌으며,
정동의 중심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 사실이 나를 비로소 불투명성 속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불투명성은 괴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나는 그 상태를 받아들이기 위해
매일 잠들기 전,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 울리는 미세한 진동을 가만히 듣는다.
그 진동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는 잃은 것이 없다.
다만,
너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를
처음으로 목격했을 뿐이다.”
그 말에서
나는 어느 정도의 진실과
조금의 절망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