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부동산 아저씨
가족 품에서, 또 고시원 작은 골방에서 자리 뉘일 곳을 마련하던 내게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독립의 순간이 찾아왔다. 정도껏 모은 보증금과 적절한 월세를 충족하는 오피스텔을 구하게 되었고, 일사천리로 이사 날까지 야무지게 잡으니 막막했던 내 ‘월세집 마련’의 꿈도 분명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설레는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새로 살게 될 동네에 대한 기대감도 팝콘처럼 달콤하게 부풀었다.
그렇게 나는 은혜와 은총이 충만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만의 작은 원룸 오피스텔로 이사를 왔다. 달달한 팝콘 같은 희망을 품고, 몇 꾸러미 되지 않는 짐들을 양손 가득 쥐고 첫 독립의 대단원을 힘차게 열었다. 나와 함께 내 짐을 나눠 들어준 부동산 아저씨의 독립 축하 인사를 들으며 내가 살아가야 할 집을 보다 꼼꼼하게 살피고 가구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많은 생각에 젖었다. 월세에서 전세, 전세에서 자가로 향하는 모던 루트. 3단계 계급으로 나뉜 ‘거주지 피라미드’에서 과연 내 위치는 어디까지 상향될 수 있을까. 스크래치 흉터가 나 있는 가전제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짐을 내려놓고 부동산 아저씨와 함께 오피스텔의 여러 이용시설을 둘러보았다. 아저씨는 오피스텔 내부에 구축된 헬스클럽과 도서 공간을 소개해주며 의지만 있으면 입주민 누구나 건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는 “그럴 것 같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낡은 책 표지를 쓰다듬었다. 아저씬 책 하나를 집어 도서를 대출하는 방법, 도서 반납일 등 아주 세밀하고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아저씬 빌린 책을 내 손에 쥐어주며 “반납 잘해요!”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한 손에 가볍게 들린 도서 한 권을 멀끔히 내려다보았다.
‘혼자지만 아파트는 갖고 싶어(저자:한정연)’
이후 우린 1층의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했다. 아저씨는 분리수거함을 일일이 소개하며 쓰레기봉투 및 음식쓰레기 구입처와 입주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 등을 간단히 설명했다. 이어 관리실의 상세한 위치를 짚어주며 "관리실 아저씨랑 친하게 지내요."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친절 속에 오피스텔의 모든 시설을 차분히 익힐 수 있었고, 낯선 동네와의 내적 친밀감을 두둑이 쌓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라는 나의 감사 인사와 함께 우리의 짧은 오피스텔 투어는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가전제품이 고장 나거나,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 전화 달라는 다정한 멘트를 전하며 직사각형의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내가 웃으며 멋쩍게 명함을 받아 들자, 아저씬 기분 좋게 웃으며 물었다.
“집이 좀 좁아서 걱정되죠?”
아저씨의 말에 뜨끔한 내가 흠칫 놀라며 움찔하자 아저씬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이사오는 분들 처음엔 다 아가씨랑 똑같은 반응이에요. 심란한 표정으로 네, 네. 그런다고. 그럴 때마다 제가 그래요, 여기에서 실망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으니 지금부터 악착같이 벌어서 조금씩, 천천히 평수를 늘려가 보라고요. 그러다 보면 언젠간 원하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요.”
아저씨는 가볍게 내 어깨를 툭툭, 격려하며 말을 이었다.
“좋은 날 이사 오는 만큼 언제나 좋은 일만 가득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잘 지내봐요! 다음엔 더 큰 집 소개해줄 테니까, 돈 많이 모아 두고요. 포기하지만 마요! 알죠?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랍니다.”
나는 아저씨가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마음이 담긴 응원의 말을 곱씹고 되짚었다. 가슴속 어딘가에 울컥,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첫 독립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지난날과 월세방을 둘러보며 막막한 미래를 걱정했던 오늘이 뒤엉키며 분명한 해답이 떠올랐다.
그래. 내 인생에 뭐가 되었든 포기는 없을 거다. 왜냐고?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니까!
크리스마스이브의 축복이 따사로운 햇살이 되어 내리비췄다. 무언의 다짐에 확신이란 선물을 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