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관계학

-을(乙)이고 싶었던 갑(甲)의 이야기

by 강일영

‘뭐해?’


무료한 일상의 정적을 깨는 그의 문자는 단조로웠다. 그야말로 한눈에 읽히는 사사로운 문자였지만 휴대폰을 잡고 있는 손은 땀에 절어 울고 있었다. 뭐해? 뭐해…? 뭐… 해? 그의 억양으로, 그의 말투로 수십 번을 읽었다. 이게 얼마만의 문자더라? 시간을 헤아리고, 별것도 없는 추억을 헤아렸다. 또 시작이다. 또다시 그에 대한 미련이 물결처럼 일었다.


나는 K를 좋아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2년간 내 심장은 핑크빛으로 반짝였다. 내 모든 단어의 시작은 K였고, 하루의 마무리는 K가 남긴 잔상이었다. 거친 그의 말투, 못된 말들만 골라 던지는 썩어빠진 인간 됨됨이. 뭐 하나 정 가는 구석이 없어도 이상하게 싫지가 않은 사람이라, 맑고 투명했던 내 마음의 호수는 심연이 되었다.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아팠고, 슬퍼졌다.


한참을 단순, 복잡한 생각들을 늘어놓으며 답장의 이유를 찾았다. 쓸데없는 문자 쪼가리에 나는 왜 답장을 해야 하는가, 무시하면 될 일인데 굳이, 정말 구태여 답장을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참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정해진 정답처럼 분명한 답안지가 둥실 떠올랐다. 그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없으면 못 견디겠으니까. 그러니까 그런다. 그러니까.


그가 보낸 문자의 속내는 뻔했고, 굴려지듯 놀아나다 상처 받고 버려질 내 미래는 분명했다. 영상 보듯 뻔한 다음 스테이지에 차갑게 굳은 이성이 번쩍! 하고 빛을 내며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재빨리 그의 문자를 삭제하고, 휴대폰을 저 먼발치로 치워버렸다. 바쁘게 머리 굴리면 상황이 잊힐까 싶어 동공 가득할 일을 탐색하기 바쁘고, 손가락은 엊저녁에 컨펌받은 시나리오 파일을 열심히 뒤적이기 바빴다.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행동들을 나노 단위로 쳐다보고 있자니 입 안쪽이 씁쓸해졌다.


태양이 자리를 뜬 서울 하늘엔 어느새 깜깜한 검은 먹물이 군데군데 퍼지듯 드리우고 있다. 표정을 잃은 나는 물 흐르듯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에 맞게 퇴근 준비를 하면서도 제 색을 잃어버린 초라한 하늘을, 그리고 더 초라하게 남아버린 나의 휴대폰을 올려봤다. 지금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하진 않을까. 답장이 없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 문자를 기다리진 않을까. 그도 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움받고 싶진 않은데. 그냥 답장할걸…


숨 막히는 간절함이 깨치듯 올라왔다.


복잡하게 얽힌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 전철에 오르는 내내, 등 떠밀리듯 내려 자취방까지 우둑우둑 걸어가는 내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기저기 흩어진 다짐들을 붙잡는 일이었다. 같잖은 프랜드십이 만들어낸 허상의 관계에 죽자 살자 목매달지 말자. 나답게, 쿨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툭툭 털고.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잖아? 어려운 일 아니잖아.


다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스스로 바빠지기로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넷플릭스에서 봤던 영화를 다시금 재생했다. 깨끗하게 샤워도 마치고 맛있는 밥도 배부르게 먹었다. 바지런하게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좋아하는 책도 보고, 아까 산 맥주를 꺼내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 코미디와 버무려가며 깔깔대며 걸쭉하게 웃었다. 작은 원룸에 댕댕, 내 웃음소리만 지루하게 뿌려졌지만 내 시선은 낡은 휴대폰, 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았다.


거나하게 취기가 바짝 올라오는 11시, 무던해진 이성의 끈보다 날렵한 건 울퉁불퉁 모난 손가락이었다. 눈감고도 알 수 있는 익숙한 번호를 눌러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멀리 밀쳐내려 해도, 참 가까이 있는 사람이구나. 자뭇 씁쓸해졌다.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뭐라 이야기하기 전에, 다급한 내가 먼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안. 아까 바빠서. 그게 있…잖아.”

토하듯이 다급하게 뱉어낸 모자란 말투. 그는 대체 이런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대답에서 생각을 읽고 싶었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즐거운 한때를 알리는 소란스러운 주변음만이 내 처지를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그래.”


많은 기대로 다음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심드렁했다. 툭툭 내던지는 그의 말꼬리를 애처롭게 붙잡으니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더한 울음이 터지기 전에 내가 먼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고, 내 공간은 반쯤 구겨진 텅 빈 맥주캔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괜히 했어… 기가 막힌 후회가 밀려왔다.


언젠가 우리 관계에 대해 되짚고 또 되뇐 날이 있었다. 검푸른 밤이 몰려올 때까지 나는 이 일방적인 감정으로 지배되는 인연의 선을 쭈욱 따라가 엉킨 실타래의 뭉치를 조금씩 풀어냈고, 끝끝내 펼쳐냈다. 놀랍게도 그날 내가 본 사실은 우리의 사이에 존재하는 상하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상하의 관계 속에 언제나 난 멀쩡한 ‘갑(甲)’이었다. 애처롭던 만남마다 나로 인해 분명히 끊어지기도, 위태하게 이어지게 하는 철저한 상(上)의 위치. 그 중심엔 언제나 내가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싶다. 냉담하게 그를 끊어내고 싶다. 그 모든 열쇠는 내가 쥐고 있지만, 그게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 그와 내가 같은 입장이었다면 훨씬 수월했을까. 같은 마음이었다면 덜 외로웠을까.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서로의 관계가 가슴 아프게 와닿는다.


짙은 어둠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시간마다 내 하늘에 나타나던 그. 말갛게 뜬 그 얼굴을 따라 별자리를 만들어, 내 속마음을 가둬본다. 생각만 해도 행복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던 그때의 나와 스치는 장면마다 색다르게 보고 싶던 그때의 그. 언젠간 덤덤하게 전해주고 싶었던 내 마음들을 담아 예쁘게. 그는 알아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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