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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22. 2024

나를 구원하러 온 나의 파멸자

-불안의 긍정과 임계

  불안은 위험한 독입니다.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 있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느 순간 치사량이 넘으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네요. 임계치가 넘은 불안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한 깊은 후유증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불안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 불안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자신의 불안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불안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없고 그 때문에 불안에 먹히기도 합니다. 불안은 소리도 없이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을 보면 많이 느낍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없구나. 사람의 모든 감각을 만족시키기로 작정한 듯한 형형색색의 흥미로운 현대 세상에서 누구 하나 그것을 맘 편히 즐기고 있는 사람은 없네요. 밤새 게임을 하고 클럽에서 기절할 때까지 춤을 추고 위경련이 일어날 만큼 술을 퍼마셔도 다음날에는 일어나서 공부(발전)를 해야 합니다. 시험공부든 자격증 공부든 혹은 대외 활동이든 마치 지느러미를 멈추면 죽는 참치처럼 항상 어딘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삶을 갈아가며 버텨내는 걸 보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잘 노는 ‘멋진 청년’이라 말하는 세상은 어딘가 두렵기까지 하네요. 그냥 죽기 직전의 청년 아닌지.

 모두 취업 시장, 결혼 시장, 인맥 시장에서 도태될까 무서워 남들이 다하는 ‘평균’이라도 되고 싶어 안간힘입니다. 노력하지 않다 남들보다 못한 삶이 주어지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수많은 미디어가 높여 놓은 ‘필수’값에 맞추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탈태의 근원에는 확실하게 ‘불안’이 자리 잡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이네요. 그렇지 않고 단순 자기 계발 욕구라고 하기엔…. 자신을 학대해가며 번아웃이 오기 직전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것도 자신의 욕구가 아닌 남이 기대하는 기준치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독이... 분명 사람들을 더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반쯤 죽은 눈으로라도 어딘가로 계속 움직이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약과 독의 차이는 배합의 차이일 뿐. 적당한 독은 약으로 쓸 수 있고 많은 약은 독이 될 뿐입니다. 불안은 우리에게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쉬이 타락과 정신의 마비에 빠질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울타리이기도 하니까요. 언제나 탈선 할 수 있고 쉬이 망가질 수 있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묶어주는 끈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괴물처럼 열심히 사는 친구들 혹은 제멋대로 살다가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린 친구들을 보면 불안이라는 공통범주로 묶여 있으니까요. 수많은 성취를 낸 사상가나 예술가도 어찌 보면 일종의 불안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쇼펜하우어도 고흐도 다자이 오사무도 평생을 그것에 고통받으며 살았으나…. 평생을 넘는 작품들과 사상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그들에게 불안은 세상을 꿰뚫는 창이면서 심장을 찌르는 바늘이었던 모양입니다. 젊은이를 묶어주던 끈이 꼬여 언제든 목을 조를 수 있는 것처럼.

 

  돌고래들이 복어를 괴롭히는 것도 독을 맛보며 짜릿한 자극을 느끼기 위함이고 아프리카 주술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는 약물도 신경독입니다(사실 산사람을 반쯤 죽여서 일으키는 것이지만;;), 우리가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듯(고행도 마찬가지) 약간의 독은 강렬한 자극으로 작용하며 감각을 싹틔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론 약이 될 때도 때론 좋은 경험이 될 때도 있지만…. 결국엔 독이라는 걸 깨달아야 그 조심성을 알고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미래도 사회도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방사능이 공기 중에 떠다닐 때처럼 자연스레 불안에 노출되고 그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일종의 이로운 독으로서 작용하여 우리를 성장시킬 수도 있지만…. 그게 분명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몸에도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겠죠. 제 주변엔 아직 불안에 굴복한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 이유는 불안에 먹혀버리면…. 천국의 망령이 되든…. 인터넷 망령이 되든….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워지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제 옆에도 제가 볼 수 없는 불안들이 공기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다 인지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고 몇몇 개는 알고도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듯하네요. 그 꽉 막힌 에너지들은 내일 당장의 성취로 저의 구원이 되어주기도 하고 언젠간 터져 제 모든 걸 파멸시킬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불안은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단지 터지는 게 내일이 아니길 바라며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 그리고 언젠가 파멸 직전에 놓였을 때 ‘내가 불안에 먹힌 건 아닌가?’라는 의문 속에서 지금 쓴 글을 기억하길 바랄 뿐입니다. 한 번에 기회라도 더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불안에 가득 찬 사람에게 ‘불안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코끼리로 머리가 가득 찬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라는 말이 더 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리니까요. 불안에서 도망치는 법은 이젠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최대한으로 쌓을 수 있게 마음의 여유를 만들고…. 불안이 거기서만 춤출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리고 그게 나의 성장과 이어질 수 있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세상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큰 불안도 사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위한 우화이길 바랄 수 밖에. 정량의 불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요. 매우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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