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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23. 2024

45도의 연애

미적지근함과 따듯함의 사이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습니다. 받아들이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지면 뜨거워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어 끓어 기화가 되어 버리고 에너지를 너무 많이 뺏겨서 차가워져도 딱딱한 고체가 되며 그 성질을 잃습니다. 하지만 끓지 않았다고 얼지 않았다고 물은 적당한 온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1도의 물과 99도의 물은 보기엔 똑같아도 삐끗하는 순간 액체로서의 물의 성질을 잃어버리겠네요. 언제나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적당함을 찾는 것인데... 적당한 물 온도는 어느 정도 알까요. 50도? 좀 뜨거울듯한데. 사랑은 또 어떨까요? 어느 정도가 얼어붙지 않고 타지 않는 적당한 온도가 될 수 있을지...? 다들 각자만의 적당함이 있겠죠.

  개인이 취향마다 다르겠지만 그 취향의 평균선을 내보면 커피는 45도 일 때 가장 먹기 좋다고 합니다. 너무 뜨거워서 식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너무 차가워서 향이 다 사라지지도 않은 적당하게 좋은 온도. 그게 45도라고 하네요. 저에겐 약간은 미적지근한 온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45도짜리 커피처럼 만날까?

  성인이 되고 나서 첫 연애였던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서로 너무 무겁게 다 주지 말고 가볍게 행복을 찾자는 말이구나. 마치 연애의 베테랑처럼, 역시 똑똑하네 너.

  실제로 가볍게 만나자는 그 친구의 입버릇이었고 초 장거리 연애가 예정되어 있던 우리는 서로에게 존중과 사랑을 담아 서로의 인생에 서로를 너무 많이 포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얼마나 여리고 약한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공항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사이 내 앞에 햄버거 하나를 놓고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가볍게라고 말하며 매일 만났습니다.  언제든 떠나도 상관없는 듯이 그게 우리의 나름의 법칙이었고 매너였던 것 같네요,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잠이 오진 않았을 텐데. 또 어찌 보면 오히려 잘 된 것 같기도 합니다. 45도에 걸맞은 마지막이었던 것 같네요.

   그 후로 코로나가 터지고 저도 입대를 하게 되어 다신 그 친구를 보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2년을 더 만났네요. 사실 그걸 만났다고 하기도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매일매일 연락을 하고 서로를 궁금해하며 생각했으니... 

  일 년에 2번 먹을까 말까 하는 따뜻한 커피를 보면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카페 커피는 너무 뜨겁게 준다고 투덜거리며 한참 동안 커피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곤 했습니다, 한번 먹어 봤지만... 저한텐 좀 미적지근했었네요. 저는 언제나 자극적인 걸 좋아하고 급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라... 이도 저도 아니었다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 말을 다시 한번 톺아보면... 강해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언제나 잔상처가 많았던 그녀를 생각하면... 45도의 커피는 쿨하고 깔끔한 연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을 오래 보고 싶었던 그의 바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뭐 제가 잘나고 멋져서가 아니라... 정 뗄 때의 살 찢어지는 고통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의 본능적인 회피 성향이 아니었나 싶네요.

  실제로 그 친구의 그런 성향 덕분에 우리는 3년간 따뜻한 온도로 만날 수 있었네요. 한번 크게 싸우고 해어졌지만 그래도 서로 뜯어져도 많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서로를 잘 닳게 만들었네요. 우리는 어찌 보면 연애의 고수는 맞았지만... 사랑의 고수들은 아니었지 않나 싶네요. 연애는 잘 숨길수록 잘하고 사랑은 솔직할수록 잘한다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솔직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넘치는 사랑을 조절하기 힘든 사람이었고 저는 과분한 사랑을 편안하게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우리는 잘 숨기는 사람이었고 꽤나 오래 좋은 연애를 했습니다.

  끓는 마음을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절하는 것. 거기에 얼마나 큰 사랑이 담겨 있는지... 최근에야 깨달을 것 같습니다. 항상 과분한 사랑만 받아온 저도 결국 이런 날이 오긴 하네요. 미적지근하려 노력했던 수많은 날이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얼거나 끓는 게 두려워서 45도를 맞추려고 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내가 미적지근해지는 날이 오다니.

  살면 살수록 세상은 더 어렵지만. 그래도 타인에 대한 이해가 커짐을 느끼곤 합니다. 과거에 너무 부족해서 그런가;;;. 확실히 아직도 저는 차라리 뜨겁거나 차리라 차가운 걸 좋아하지만... 45도의 미적지근함을 이해할 순 있게 된 것 같네요. 내 사랑이 더 뜨겁다고 해서 상대방이 본인을 덜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그냥 겁에 질려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았던 건 절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분명하게 저에게 도달한 것들은... 제가 갚을 수도 없을 만큼 과분했습니다.

  성장과 개화, 구원, 파멸...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건 모두 자기 안에 있습니다. 저 역시 제가 겪은 변화들은 제가 만들어 낸 거라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남들은 몰라도 최소한 저의 계기는 대부분 타인에게서 오는 듯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무엇인가 있다고 속삭여 주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관심을 가지고 좋아해 주던 사람들이니까요. 아마도 김애가 없었다면 저는 평생 45도의 커피의 맛 따위는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입천장 데이게 뜨겁던가 온몸이 얼어붙게 차가운 커피만 마셨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3년간 가르쳐 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마도 저는 꽤나 더 오래 45도의 온도로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까 싶네요.


  내 사전 속 漂亮이라는 단어의 주인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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