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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31. 2024

그늘은 그림자로

안식처와 아토포스


잡아먹을 듯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그늘은 한줄기 빛입니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열기 속에서 산뜻한 어둠은 우리를 식혀 줄 수 있겠네요.


그늘은 분명 어둡고 차갑지만. 그런 습한 음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과포화의 시대에선 특히.


수많은 사람들 크고 작은 갈등 수많은 가능성과 과도한 정보 속에서 우리는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지칩니다. 모든 것이 선명한 세상에서 우리의 눈을 잠깐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그런 그늘. 그런 작은 어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쉬고 싶을 뿐입니다.


그늘은 어둡고 서늘한... 안식처입니다. 그런 편안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요?


하지만 그런 그늘이 그림자가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조금만 더 어두워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버릴 테니까요.


그늘은 조금만 아파하면 (shade + ow) 그림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shadow) 






검정치마 <그늘은 그림자로>

나를 따라다니던 그늘이 짙던 날 

잠든 너를 보며 나는 밤새 울었어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누울 순 없겠지

혼자 있기 두려운 난 너 집에 남아있었네


아직 나를 사랑한다 믿어도 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내 입은 떼지지 않네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걸을 순 없겠지 

혼자인 걸 알면 됐어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해

오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걸을 순 없겠지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던 그늘 같던 사람도. 조금만 채도가 낮아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믿었던 순간도 서로 함께 했던 좋은 기억들도 나를 보던 눈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도 하네요.

 마음속에서 그림자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건 '잘 지내?'에 대한 대답 정도 밖에 없습니다. 그 외엔 알아야 할 의무도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아프기만 할 뿐. 

 존재하지 않다고 해서 마음에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장소성이 모두 소멸했다 해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일종의 '아토포스'처럼.


 그 사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에게 많이 달라졌을 뿐. 그늘과 그림자의 차이 정도밖에 달라지지 않은 그 사람에게. 왜 이렇게 서운하고 아쉬운 걸까요. 나를 지켜주던 안식처가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도 알 수도 알아서도 안되는 어둠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 어둠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겠지만. 시원하고 포근했던 그때와 달리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늘은 겨우 그림자 정도로 바뀌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네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젠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정도 밖에 알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세상은 너무 메마르고 덥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흐르는데... 저는 갈 곳이 없네요. 터덜터덜 죽지 못해 걷다 보면... 또 주인 없는 그늘을 만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두렵겠죠. 언젠가 그림자가 되리라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또 결국 그 안으로 숨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태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늘 덕분이니까요. 


그늘이 결국 그림자가 되더라도



그렇게 후회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많이 아프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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