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의 무게를 알고 있다

엄마를 살리고도 싶고 죽이고도 싶지3

by 소요

밭에 갔다 왔어?


사람이 들어왔으니 말은 하지만 아침부터 퉁명스러운 목소리. 아빠도 느낄 거다. 내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더 다정하게 말할 기운이 생기지 않는다. 아빠도 딱히 대답할 마음이 없는 듯하다. 대답인지 뭔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내 나이 오십, 엄마 아빠와 다시 같이 살 게 될 줄 몰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나간 이후 가끔 그것도 하루 이틀 다니러 왔었지, 이렇게 다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 사이에는 늘 엄마가 있었고, 엄마의 중계 플레이가 있어서 우리의 소통이 원활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중계 플레이를 해주던 엄마는 많이 아프다.


이번에 다시 살면서 알았는데, 아빠는 소통을 좀 이상하게 한다. 상대가 앞에 있는데도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알아듣기는 알아듣지만 짜증이 난다. 그리고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내가 알 거라는 가정 하에 펼쳐놓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아빠 동창 이야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살았던 동네 이야기. 엄마가 아프지 않으면 장난을 빙자하여 타박을 하거나 정색하고 지적질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빠도 짠하니 그렇게까지 못 되게 굴지는 못한다.


아빠와 또 안 맞는 것이 있다.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는다. 딱히 보지도 않으면서 그냥 틀어놓고, 잘 때도 리모컨을 들고 잠이 든다. 엄마가 시각장애인이니까 뭐라도 들으라고 틀어놓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엄마가 딱히 듣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다가 내 마음속에서 텔레비전 용도 변경이 일어났다. 집안 구석구석에 감도는 불운하고 불행하고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믿을 수 없는 정적을 가리는 역할이다. 처음에 엄마 간병하러 올 때는 엄마가 말을 잃어버릴까 봐 말 많은 내가, 엄마와 이야깃거리가 많은 내가 가서 떠들고 엄마와 대화하고, 안 되면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이 엄마의 뇌를 자극하고 엄마 기분을 좋게 만들어서 엄마를 빨리 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것 같고, 그럴 힘이 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말이 줄었다. 내가 조용해진 사이 텔레비전이라도 떠들면 집안의 적막감과 우울함을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있다. 물론 향수가 악취를 감추기 힘들 듯 역부족이라는 걸 알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텔레비전 소음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 텔레비전 소리까지는 수용 가능하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상태에서 휴대폰으로 영상을 큰 소리로 볼 때는 참지 못한다.


아 시끄러워. 하나만 틀어 놔.


아빠에게 소리 지른 것은 사춘기 이후 처음이다. 아빠가 골초였을 때 그 담배냄새가 역해서 소리를 많이 질렀다. 아빠는 딸내미 무서워서 담배도 못 피우겠네, 하면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때 냄새였는데 이번엔 소리다. 내가 뭐라 하면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 영상을 끈다. 근데 바로 끄는 게 아니고 뜸을 들이다가 끈다. 내 잔소리에 바로 끄는 것이 기분 상해서 그런가, 아니면 보던 것을 마저 보느라고 그런가는 모르겠다. 엄마가 아프니 아빠의 신세가 딱하고, 이렇다 할 낙이 없는데, 너무 몰아세웠나? 하는 약간의 후회가 밀려오지만, 나도 딱하기 때문에 아빠에게 너그럽게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거니까.


밭 맬래? 애 볼래? 하면 밭 맨다고 하는 말처럼 아픈 사람 옆에 있느니 화전을 일구는 것이 더 쉬울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아빠는 밭 매러 간다. 그 마음은 너무 잘 안다. 예전에 갓난쟁이 키울 때 나도 툭하면 애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밖에 나갔었다. 그러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가끔 집안 공기에 숨이 막혀서 그냥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아빠가 그렇게 나갈 때 나는 아무 말도 안 한다. 나도 이따 오후에 나갈 거니까. 그렇게 우리는 교대 근무를 하는데 대개 오전에는 아빠가, 오후에는 내가 나가는 식이다.

가끔 아빠를 혼자 두고 나가기는 좀 그럴 때가 있다. 엄마가 아주 안 좋을 때다. 그럴 땐 나의 답답함과 아빠에 대한 미안함이 싸운다. 어느 날은 내 답답함이 이겨서 미안함을 뒤로하고 매정하게 나간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밥이랑 먹을 거는 해놓고 나간다. 어느 날은 아빠에 대한 미안함이 이긴다. 그러면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집 안에서 답답함을 해소할 일거리를 찾는다. 오늘은 베란다 청소다.

엄마의 베란다는 정말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베란다는 고물상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이 안 간다. 베란다를 관리하던 사람은 엄마인데 엄마가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난장판이다. 물론 그 안에 엄마만 아는 질서가 있을 것이다. 또 엄마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도 있을 것이고. 나에겐 혼돈일 뿐이다. 그래도 베란다를 택한 것은 베란다에 나가면 아픈 엄마는 보이지 않고 따뜻한 햇빛이 비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베란다는 정남향이다. 엄마는 남향집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베란다에는 또 다른 엄마의 자부심이 있다. 장독대다. 볕 좋은 곳에 나란히 놓인 항아리에는 엄마가 담근 간장, 된장, 고추장이 있다. 양쪽 창고에는 김치와 장을 담글 때 사용하는 다라이들이 크기별로 소재별로 용기들이 많다. 엄마가 이걸 다시 쓰는 날이 올까?

창고 바닥에 싹이 나고 검게 썩은 감자, 엄마가 못 본 것들이겠다. 그리고 도토리, 이건 작년 가을 우리 가족이 도토리묵 좋아하는 엄마에게 주기 위해 줍고 말린 것이다. 엄마가 아프니 도토리가 방치되어 있다. 주울 땐 고생했는데, 버리려니 아깝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소금, 집안에 소금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소금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산 것인지, 그냥 많이 사서 저장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묵나물 몇 봉지, 고춧가루, 닭기름으로 만든 빨랫비누,


그리고 큰 저울이 있다.


고대 이집트 사자의 서에 보면 최후에 재판에서 심장 무게 다는 장면이 있다. 죽은 자의 심장을 큰 저울에 올려 깃털로 무게를 재는데,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울 경우 이승에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하여 괴물이 심장을 먹어버린다. 저울 없이도 나는 내 심장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엄마를 살리고도 싶고 엄마를 빨리 보내고도 싶다. 간병이랍시고 하다가 엄마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매일 내 속의 괴물을 마주하고, 가끔 괴물이 튀어나온다. 내 심장은 괴물이 먹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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