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살리고도 싶고 죽이고도 싶지4
눈을 못 뜬다. 한약을 먹여도 물을 먹여도 줄줄 흐른다. 온몸이 굳어간다. 인중과 입 주위에 몰려 있는 주름이 계곡이 되어 흐른다. 신기한 건 이 와중에 밥은 잘 먹는다. 지난가을 뇌출혈로 쓰러지고 두 번의 입원, 그리고 지금 경과 관찰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엄마를 집에서 간병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밥을 거르거나 잘 못 먹어서 애를 먹거나 양이 줄은 적이 없다. 병원 밥도 잘 먹었고, 집밥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엄마 잘 먹어서 고마워. 잘 먹으니까 금방 나을 거야.
처음엔 밥이라도 잘 먹어줘서 고마웠다. 병원에 있을 때 잘 먹지 못해 애를 먹는 보호자들을 봤었다. 그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상대적 우월감을 느꼈다. 잘 먹으니까 나도 신이 나서 열심히 해 먹인다.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잘해야 하는 내 성격상 제대로 한 상 차려 해 먹인다. 애를 키울 때도 이렇게 제대로 해 먹인 적이 없다. 한의원에서 소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뜨끈한 국을 먹으라는 지침을 줘서 삼시세끼 고깃국을 해 먹인다. 다양한 고깃국 레시피를 찾아서 매일 다른 국을 끓인다. 먹는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해 먹이는 내가 지겨워서 그런다. 하루에 절반 이상을 요리하고 밥 먹이는데 시간을 쓴다. 이렇게 인풋이 있어도 아웃풋은 없다. 더 안 좋아지는 날도 많다. 그럴 때도 밥은 잘 먹는다. 신기할 따름이다. 눈을 감고 있더라도 밥이 들어오면 입은 바삐 움직인다. 밥을 해서 가져가기만 해도 냄새를 맡는 건지, 열기에 반응하는 건지 입이 저절로 열린다. 떠먹이는 숟가락이 아직 갈 생각도 안 하는데 엄마는 입을 벌리고 있다. 안부를 묻는 친척들의 전화에도 엄마는 안 좋지만 식사는 잘하신다고 대답한다.
눈 감고도 잘 먹는 게 신기해. 먹으니까 언젠가 낫겠지.
나의 감정은 ‘고마움’에서 ‘신기함’으로 바뀌고, 부사도 ‘금방’에서 ‘언젠가’로 바뀐다. 이제 금방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고 이미 현실이다. 그리고 사실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희망도 옅어져 간다. 모든 면에서 퇴행하고 있는 것 같은 엄마를 볼 때 속이 상한다. 그러면서 밥만 잘 먹는 엄마가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면서 꼬박꼬박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삼식이를 보는 느낌이다. 그럴 때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잘 먹네. 그래 먹는 거라도 잘 먹어. 먹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그새 나의 감정은 사라지고 빈정거림만 남았다. ‘언젠가’라는 막연한 기대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에 다다른다. 그럴 땐 떠먹이는 숟가락도 태만하다. 숟가락에 입에 쏙 들어갈 만큼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으려고 애쓰지도 않고, 빨리 먹고 치우고 싶은 마음에 입에 아직 음식이 있는데 밥 숟가락을 밀어 넣기도 한다.
잘 먹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예전에는 마음속으로만 하던 소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튀어나온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대,라는 말도 곧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가 이 와중에 잘 먹는 건 살겠다는 의지의 발현일까, 살려달라는 메시지의 발신일까. 어쨌거나 거의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잘 먹으니까 죽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도 있고, 이렇게 살 바에는 편히 죽었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잘 먹으니까 잘 죽지도 않을 것 같아 앞이 깜깜하다. 엄마를 살리고도 싶고 죽이고도 싶다. 죽어가는 모양새인데 잘 씹어 먹는 악착스러운 입을 본다. 하염없이 엄마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을 보고, 잔뜩 흐른 하늘을 보고, 흐린 날 밖에 걸린 빨래를 본다. 내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잔인함을 보고 나와 닮지 않은 엄마의 다소곳한 속눈썹을 본다. 다짐한다. 저렇게 먹는 거 좋아하는데, 아니 좋아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있으니 죽을 때 죽더라도 잘 먹고 보자. 밥을 차려 엄마에게 갖다 바친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기 전에 엄마에게 많이 하던 말을 해본다.
맛있는 거 많이 먹어. 나중에 제삿밥 얻어 먹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많이 먹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