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많이 아프고 딸은 돈을 챙긴다

호의는 좀 나중에 보답할게요

by 소요

“엄마, 오늘 도서관 가다가 현주 이모 만났어.”


엄마 간병으로 떨어져 살고 있는 딸은 매일 나에게 두 번 전화한다. 학교 갈 때 한 번, 방과 후 한 번.

학교 갈 때는 할머니 컨디션을 먼저 묻는 예의를 다한다. 엄마 컨디션이 좋아서 제한적이지만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고 내가 판단하면 스피커 폰을 켠다.


할머니, 오늘 기분은 어때?

괜찮아.

밥은 먹었어?

응, 밥 먹었어.

아침 뭐 먹었어?


컨디션이 최상이었을 때도 뭘 먹었는지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대화가 불가능할 때는 바로 화제를 전환한다. 오늘의 날씨, 아침으로 먹은 것, 인터넷에서 본 이런저런 것들, 선거때는 선거 이야기, 요즘은 민희진과 하이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방과 후에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는데 오늘은 좀 다른 소식이다.


“이모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하고 집에 가는 중이었대. 이모가 나 키 많이 컸대.”

“아이고, 이를 어째. 왜 돈을 줬대. 다음부터는 돈 말고 편의점 가서 마실 거 사달라고 해.”


아이가 받는 용돈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딸은 내가 돈을 거절할 때마다 웃긴단다. 어차피 주게 될 돈, 받을 돈인데 돈 주지 마라, 됐다, 너무 많다, 조금만 줘라, 하지 말고 그냥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받고 나중에 보답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냐고 한다. 맞는 말인데 아직도 그런다.


동네에 사는 선배 언니는 딸을 정말 조카 이상으로 챙겨준다. 때마다 용돈이며 선물을 챙겨주고, 딸과 만나면 어린 아이가 아닌 인격체로 존중하며 대화를 해준다. 딸에게 부모 말고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두고 두고 좋은 일이다. 평상시 같았으면 언니에게 바로 연락해서 왜 돈을 줬냐,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뭘로 갚을 수 있는 게 없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살면서 호의를 받으면 바로 보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주는 게 낫지 받으면 그 이상을 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많이 아프니까 최소한의 예의라고 붙들고 살았던 것들을 생략하게 된다. 지금은 그냥 받아도 되는 때고, 언젠가 보답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도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엄마, 오늘은 누구 만났는 줄 알아? 미경 이모랑 삼촌 만났어. 이번에도 용돈 주시려고 하더라고. 근데 어제 엄마가 돈 받지 말고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랬잖아. 그래서 돈 말고 레몬에이드 사달라고 했어. 그리고 카페에 가서 레몬에이드 샀는데, 또 용돈도 주셨어. 안 된다고. 엄마한테 혼난다고 했는데, 아이 때는 용돈 받아도 된다고 하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또 받았어.”


이렇게 말 잘 듣는 딸이라니. 용돈 대신 먹을 거 사달라고 하는 당돌한 딸을 보고 웃었을 언니가 생각났다. 사실 언니는 나와 소원해진 관계다. 만난지 꽤 되었다. 하지만 딸에게는 이렇게나 따뜻하고 진심이다. 언니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이미 엄마 소식에 대해서 전해 들었을 것이고, 그 마음을 딸에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호의에 보답할 시간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나보다는 딸에게 표현되는 호의, 특히 나의 부재 중에 아이의 마음을 채워주는 마음들, 지금 날씨보다도 따뜻하다.


그나저나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다들 많이 걸어 다니나 보다. 걸어 다니니까 만난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많이 걸으면 좋겠다. 우리 집에 걷는 거 좋아하는데 걷지 못하는 사람 셋이 살고 있다. 엄마랑 아빠랑 나가서 걸어보는 게 평생 소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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