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국산생물고등어
아빠가 나가더니 손에 까만 봉지를 들고 왔다.
뭐 샀어?
고등어
얼마야?
만 원
한 손에?
응
노르웨이?
아니 국산
맨날 헷갈린다. 고등어 한 손이 한 마리인지, 두 마리인지. 나도 가끔 고등어를 사 먹긴 했다. 그런데 한 토막씩 진공 포장되어 있는 것을 샀었으니까, 시장처럼 한 손, 두 손 그렇게 셀 일이 없었다.
갑자기 고등어를 세는 단위, ‘손’이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보통 ‘손’은 한 손에 잡히는 양을 말하는데, 고등어 한 손은 크고 작은 두 마리를 섞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거참 재밌네. 그 의미를 알고 나니 더 이상 헷갈리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고등어 한 손 사 오면, 어떤 놈이 큰 놈이고 어떤 놈이 작은 건지 비교는 해보겠지.
그나저나 고등어를 사 온 거 보면 고등어가 먹고 싶었나? 하긴 아빠, 엄마는 고등어를 좋아한다.
오늘은 뭐해서 먹었어?
고등어 한 토막 굽고…
엄마랑 통화하면 서로의 식단부터 체크하곤 했는데, 내 기억으로 이삼일에 한 번씩은 고등어를 해 먹었던 거 같다. 정말 고등어라는 생선을 좋아하는 건지, 그냥 싸고 만만하니까 사 먹는 건지, 오메가 3 어쩌고 저쩌고 하는 등 푸른 생선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일부러 챙겨 먹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는 고등어를 자주 해 먹었다.
단, 국산 생물고등어라야 했다. 요즘 노르웨이산 고등어가 크고 싸고 맛있다고 해도 엄마는 국산 생물 고등어만 고집했다. 고등어를 사러 갔다가 국산 생물 고등어가 없으면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엄마는 종교가 없는데, 그놈의 국산생물 고등어는 종교처럼 떠받들었다.
그 좋아하는 고등어인데, 그동안 안 해드렸다. 한의원에서 처방한 엄마 식단 때문이다. 엄마는 지금 한의원에서 지어온 한약을 먹고 한의원에서 처방한 식단에 따라먹고 있다. 병원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수소문한 끝에 찾아간 한의원이었다.
한의원에서는 엄마의 상태를 허약하고, 심장이 약한 상태로 보았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식단이 중요한데 매끼 소고기, 닭고기로 만든 따뜻한 국을 먹으라는 처방을 했다. 평소 생선을 먹는 채식주의자에 가까웠던 엄마였는데 병들어 누워있는 동안 먹은 소고기가 평생 먹은 소고기보다 많을 것이다. 나는 매일 소고기와 닭고기, 맑은 국과 얼큰한 국을 번갈아가면서 국을 끓인다. 육개장, 닭개장, 소고기뭇국, 소고기시래깃국, 소고기샤부샤부, 미역국, 곰탕, 설렁탕, 삼계탕, 오리백숙 같은 걸 주로 끓이고, 가끔 주위에서 가져다주는 염소탕, 장어탕, 추어탕 같은 보양식을 먹이고 있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다. 다들 한 번씩은 해보는 생일 밥상도 차려드린 적이 없다.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엄마가. 준비해온 것들로 엄마가 밥상을 차렸다. 엄마도 밥 해서 먹이는 것을 좋아했고, 나도 엄마가 밥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늘 얻어먹기만 했고, 평생 얻어먹을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밥 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평생 엄마에게 얻어먹기만 하다가 이제는 엄마에게 밥 해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공부하면서 열심히 국을 끓이고 있다. 엄마가 다른 건 다 안 좋아도, 심지어 눈을 뜨지 못해도 입에 밥을 넣어주면 열심히 잘 먹으니까 신이 나서 밥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생초보였지만 열심히 반복적으로 국을 끓이다보니 육개장 같이 좀 난이도가 있는 국도 잘 끓일 수 있는 실력자가 되었다. 직장도 그만뒀겠다, 지금 쌓고 있는 국 끓이는 기술로 나중에 국밥집이라도 해야 하나 상상해보기도 했다. 열심히 밥을 해먹이다 보면 엄마도 좋아지겠지, 잘 먹으니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년째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삼시세끼 내가 이렇게 잘해 먹이는데, 한의원에서 먹이라는 대로 먹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나빠지기만 할까.
아빠가 사 온 고등어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한의원에서 처방한 식단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것 마음껏,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임신했을 때 그랬다. 그 좋아하던 커피, 맥주를 포기 못해서 너무 먹고 싶을 때 한 잔씩 마셨다. 너무 참는 것보다 너무 먹고 싶을 땐 먹는 것이 임산부나 태아의 건강에 더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떤 지나가던 의사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고. 임상 결과(^^)도 훌륭하게 나왔다.
다시 생각해 보니 한의원에서는 고등어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고깃국을 많이 먹으라고 했지, 고등어를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메인으로 고깃국을 먹더라도 고등어 한 토막 정도는 사이드로 곁들일 수 있는 건데, 나도 참 고지식하다. 그만큼 내가 많이 경직되어 있다는 얘기다. 고등어는 잘못이 없다. 내 잘못이었다.
이제 고등어를 먹기로 했다. 혹시 아나. 엄마가 신봉하던 국산 생물 고등어를 먹다 보면 좋아질지. 평소 좋아하는 거 먹다 보면 엄마, 아빠 기분이라도 좋아지겠지. 고등어를 굽자. 베란다에 나가서 남편이 가져다준 캠핑 의자에 앉아 햇빛을 쬐며 바람을 느끼며 고등어를 굽자. 고등어 굽다보면 내 기분이라도 좋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