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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Jun 07. 2024

아프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지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가끔 후회한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 서울 큰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던 것을.


늦가을 일요일 오후 나는 다음날 회사 행사에서 프리젠테이션을 맡아 준비하고 있었고, 남편과 딸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는 주로 엄마가 하지, 아빠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구급차 불러 응급실에 가고 있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내려가고 있는데 응급실에 있는 아빠에게 또 전화가 왔다. 뇌가 밀렸다고 했다. 뇌가 밀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외상에 의한 만성경막하출혈, 즉 계단에서 넘어졌을 당시에는 출혈이 거의 없었고 자연흡수되었지만, 서서히(만성) 뇌의 경막 아래쪽으로(경막하) 출혈이 생겨서 그 출혈에 의해 뇌가 밀린 거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딱히 큰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병원 혹은 병원 시스템에 대해서 무지한 나는(우리 가족은) 공황 상태가 되었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무 생각도 정리할 수 없었다.


엄마가 실려간 그 병원에서 해결이 되는 건지, 소위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은 응급실에서도 죽 치고 기다리고 바로 수술도 할 수 없어서 다른 병원을 전전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큰 병원에서 입원이나 수술을 빨리 하려면 의사가 아니더라도 병원과 관련하여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찾아보라고 했다. 우리 집안에는 의료인이 없다. 공부 잘 하는 동생 중 하나는 의대를 보냈어야 했나. 그 옛날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의예과 그 친구와 결혼이라도 했어야 했나. 이래서 대한민국이 의사 의사 하나?


아, 있다. 뒤늦게 생각났다. 결혼식 이후 연락도 안 하던 외사촌 동생 부부가 의사였다. 염치 불구하고 외삼촌에게 부탁하여 전화를 걸었다. 뾰족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어떤 병인지, 어떤 상황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렇다 할 조언을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최종 결정은 보호자들의 몫이다.


일요일 저녁이라 다음날 담당 의사의 출근을 기다려야 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 옆에서 뇌가 밀린 게 뭔지 알아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밤을 새웠다. 동생과 나는 막연히 서울로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담당의사를 만났다. 동생과 나는 면담을 통해서 이 병원에서 빠르게 수술을 받는 쪽을 선택했다. 30분 넘게 손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 믿음직스러웠다. 외상으로 인한 만성경막하뇌출혈, 그리고 천공배액술은 신경외과 수술 중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에 속하고(맹장수술보다도 쉬운, 신경외과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수술이라고 했다), 빠르게 수술하면 예후도 좋은 편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우리는 의사의 말을 신뢰했다. 처음 낙상하여 응급실에 왔을 때부터 외래로 엄마를 진료하고 관찰하고 있던 의사여서 잘 알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보여준 신뢰와 존중의 표현이 담당의사를 굉장히 뿌듯하게 만들고 있음을 느꼈다. 고양된 자존감이 오롯이 엄마의 수술에 미치기를 기대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친척들이 왜 지방병원에서 수술-그것도 뇌수술을 하냐며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했다. 공부해서 서울로 못 가더라도 아프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믿음이 강력했다. (예전에 서울대 30명씩 보내던 나름 지역명문고라고 불리던 지금은 1~2명 보내기도 힘들다고 한다) 체감상 감기만 걸려도 서울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부모님을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모시고 간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효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았던 우리는 천하의 불효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말들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다. 엄마는 빠르게 수술을 했고, 뇌는 바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퇴원하고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하여 김장까지 했다.


그런데 김장이 끝난 후 엄마는 서서히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수시로 수술한 병원에 가서 뇌사진을 찍었다. CT와 MRI상으로는 문제가 없다면서 운동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수두증이 의심되지만 사진 상으로 뇌가 깨끗하다고 했다. 무심한 의사의 태도에 우리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할 것 같다고 소견서를 부탁했다. 서울에 간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담당의사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그게 지방병원 의사일지라도 대한민국 최고의 직업으로 생각되는 의사의 자격지심과 비애, 무기력을 느낄 수 있었다. 툭하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겠다는 소리를 듣는 듯 했다. 의사로서 최소한의 체면도 버리고 나에게 그럴 줄 알았다, 가고 싶으면 가라는 냉소적 반응을 대놓고 드러냈다.


우리는 결국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으로 엄마를 데려갔다. 응급실에서 꼬박 하루를 기다려 입원했고, 일주일 동안 갖은 검사를 다 받았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더 안 좋아졌다. 병원에 갈 때는 엄마는 기운만 없을 뿐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발로 걸어들어 갔는데, 나올 땐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원인을 찾기 위한 갖은 검사와 요추천자라는 시술 이후에 병원에서 섬망이 나타났고, 이후 운동능력, 인지능력이 급속도로 안 좋아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큰 병원의 교수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뇌출혈 수술은 잘 된 것 같고 수두증인 것 같지만 증상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했다. 하긴 의사가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다. 솔직히 잘 모르는 듯 했다. 명확한 병명, 뾰족한 치료법과 친절한 설명도 없이 경과 관찰하자며 퇴원시켰다. 이후 엄마는 가족들의 돌봄을 받으며 집에서 지내며 간간히 병원에 가서 차도 없음을 확인받고 집에 온다.


주위에서는 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다녀온 뒤 더 안 좋아지고 있냐며 안타까워 한다. 이재명 대표가 헬기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날아갈 때 정말 착찹했고, 우리도 서울 큰 병원에 와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달라졌을까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대학병원에서의 진료 과정과 결과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큰 병원의 의사도 잘 모르는 병에는 무력하거나 무심했고, 엄마의 병에는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어떤 병원이 정답일까. 지방병원과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경험한 바로는 지방병원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일도 아니고, 큰 병원이라고 무조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동생과 나는 지금까지 결과를 봐서는 지방병원 그 의사도 돌팔이는 아니었네, 라는 말을 한다. 서울의 큰 병원의 의사도 엄마를 살리는 신은 아니었다.


후배 아버지가 아파서 수술을 하는데 부산에서 해야할지 서울로 와야할지 고민된다기에 가능하면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지방이라 무시한다기보다, 서울 큰 병원이라고 맹신한다기보다, 그게 여러모로 감정적 비용을 덜 치른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도 많다. 가족이 병들고 아픈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열악한 위치에 놓인 환자와 보호자들은 주어진 상황과 정보를 종합하여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각자가 처한 상황, 각자가 가진 인적, 물적 네트워크와 정보, 삶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은 다 다르다. 결과적으로 미숙하고 부족하고 아쉬울지언정 가족을 죽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각자의 등불을 밝히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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