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유 Jun 06. 2024

엄마가 아프니까 우린 책을 읽지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책과는 거리가 먼(멀다고 생각했던) 동생이 책을 내밀었다.


깜짝 놀랐다. 동생이 이 책을 어떻게 알았을까? sns 피드에 뜬 광고를 보고 사서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내가 생각만 하고 꾸물거리고 있는 사이, 동생이 먼저 사서 읽은 것이다.


새삼 sns 알고리즘에 놀랐다. 엄마가 아픈  알고 우리 남매에게 광고가 동시에  것이다. 하긴  어떻게 모르겠는가. 동생은 매일 의료기기와 간병에 필요한 용품을 주문해서 보내주는  일이고, 나는 엄마가 앓고 있는 수두증에 대한 의료 정보를 검색하고 뇌출혈 뇌질환 환우카페 들락거리고 있는데


"읽어봐. 엄마 얘기랑 비슷해."


동생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낯설고 비현실적 장면에 눈물이 날 지경인데, 동생도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있다.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수술하면서 동생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그리고 병원을 전전하다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는 엄마를 보면서는 오히려 덤덤한 듯 보였다. 이렇다 저렇다 표현을 안 해서 그 속까지는 몰랐는데 동생 역시 안 읽던 책까지 사서 읽으면서 저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때가 아이를 낳고 한참 육아하던 때였다. 남들은 아이가 축복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질문이었다. 아이가 생겨서 낳긴 했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아이라는 세계, 아이를 통해 만나는 세계가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도 읽으면서 두려움의 장막을 걷어내고 아이를 통해 새로 만난 세계를 받아들이려고 애썼. 육아라는 돌봄의 세계에 적응이 되어 편해질 무렵 다시 간병세계가 시작되었다.  책의 부제인 '가족의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 대하여 매일 생각하고 스스로 질문을 한다.


엄마를 어떻게 돌보는 것이 좋은 걸까.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은 뭘까.

가족이란 뭘까.

가족으로서 나의 의무와 책임은 어디까지이고,

이미 고갈되어 있는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좋은 죽음이라는 것은 뭘까.

어떻게 죽어야 할까, 아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


폭포수처럼 머리 위에 떨어지는 존재론적 질문들에 정신이 혼미하다. 대답은커녕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마구 휘청인다. 빠르게 답을 찾을  크고 무거운 질문, 답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는 어려운 질문에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의 병명은 엄마가 앓고 있는 병과 같다. 수두증은 머리에 순환이 되어야 하는 척수액이 뇌에 정체되어 걷지 못하고, 치매와 같이 인지와 기억력이 떨어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증상이다. 병명은 같지만 두 어머니의 증상과 객관적인 조건들은 꽤 다르다.


작가는 두 언니와 함께 병든 어머니를 약 11년간 돌봤다. 우리는 고작 반 년째 엄마를 돌보고 있다. 작가는 직접 돌봄이 아니라 입주 간병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돌봤다.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는 직접 돌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수두증의 유일한 치료 방법인 션트 수술을 했고(오작동으로 몇 번의 수술을 더 했고), 엄마는 션트 효과가 없을 것 같다고 담당 교수가 권하지 않아 집에서 지내면서 경과 관찰만 하고 있다. 말이 좋아 경과 관찰이지, 병원에서 수술적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포기한 거나 다름없다.


동생이 건네준  책의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책은 도움이 되거나 위로가 되기도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돌봄의 과정에서 오는 절망과 분노,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들에 대한, 간병과 죽음에 대한  보편적이고 쉽게 예상 가능한 이야기에서부터 앞으로 우리경험하게  간병인과의 문제까지.


지금처럼 우리가 직접 간병할 것인지, 간병인에게 맡길 것인지, 더 나아가 관련 시설에 엄마의 돌봄을 위탁할 것인지 고민 결정할 시기가 올 것이다. 간병인에게 맡길 경우 간병인과의 소통과 관계 문제는 필연적이고 이는 사람 있는 곳에서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작가는 간병인으로 인한 문제로 고통받았지만 본인이 직접 간병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그 문제를 감수했다. 많은 간병인들이 거쳐갔는데, 간병인을 해고하기도 하고, 간병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물건을 훔쳐가는 것을 눈감기도 했는데 그것이 스스로 간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직접 간병의 어려움과 고통보다 우리 가족 안에 간병인을 들이고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더 두렵긴 하다. 인간관계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하면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고 간병인과 소통과 관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떤 어려움을 선택해야 하는 지의 문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의 맨 장의 문장이었다.  


Ducunt volentem fata,

nolentem trahunt.

운명은 순순히 따르는 이에게는 길을 안내하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이는 억지로 끌고 간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조금 좋아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엄마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엄마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을 순 있어도 적극적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힘겹게 걸어가는 엄마 곁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우리 남매는 엄마 간병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앞으로도 말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 어느 공유하는 것이 생겼고,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하게 될 수많은 결정들의 토대가 될 것이다:  사실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


                    

이전 06화 아무리 아빠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