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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Jun 05. 2024

아무리 아빠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같이 살기 위해 바꿔야 한다

내가 엄마 집에 완전히 오게 된 건 아빠 목소리 때문이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해서 기차 타고 집에 왔던 날 밤,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충격받았다.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마에 없던 주름이 생기고 며칠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픈데 아빠마저 병이 나면 정말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휴직하고 그날로 짐 싸서 내려왔다.


내가 엄마 집으로 완전히 오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오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엄마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못 오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나를 말리지 않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한 달만 있을 거라고 했는데, 두 달째로 넘어가고 어느덧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집에 가란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빠도 힘들고 겁이 나고 자신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같이 살게 되었고, 함께 엄마 간병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같이 엄마를 일으키고 앞뒤로 붙잡고 욕실로 엄마를 데려간다. 내가 엄마를 씻기고 나면 아빠가 옷을 입히고 엄마 머리를 말린다. 아빠가 장을 봐오면 내가 밥을 하고, 내가 밥을 먹이면 아빠는 엄마 운동을 시킨다. 내가 청소하고 빨래를 하면 아빠는 쓰레기를 가져다 버린다. 내가 엄마한테 짜증을 내면 아빠는 조용히 나에게서 엄마를 데려가 낮은 소리로 달래곤 한다.


딸내미 화났다. 약 잘 먹고 운동하자.


아빠는 예전부터 이래라저래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같이 사는 데 특별히 불편하고 그런 건 없다. 어렸을 때 아빠에게 많이 듣던 몇 안 되는 잔소리 중 하나는 ‘꾸물대지 말라’는 거였다. 어렸을 때 나는 학교 가기 싫어서 늦잠을 자고 늑장을 부리곤 했다. 아빠는 내가 꾸물대다가 늦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런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뭐든 미리 준비하고,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잔소리는 아빠가 많이 듣는다.


“양말을 왜 여기에 벗어 놓는 건데?”


제일 많이 하는 잔소리다. 왜 보기 싫게 현관에 양말을 벗어 놓냐고. 그것도 뒤집어서 벗어놓는다. 평생 그러고 살아왔을 테니 쉽게 고쳐질 리가 없다. 엄마가 오냐오냐 받아준 탓도 있다. 처음엔 잔소리 한 다음 내가 치웠지만, 이제는 그냥 처 놔둔다. 양말도 뒤집어서 벗어놓으면 그냥 뒤지어진 채로 개어놓는다. 역시나 잔소리는 효과가 없고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다. 언제까지 이러는지 두고 보고 있다.


“아, 시끄러워. 하나만 봐!”


그다음은 텔레비전과 휴대폰 소리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 휴대폰으로 뭔가를 큰 소리로 볼 때가 있다. 내용도 마음에 안 든다. 같은 연배에 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이상한 영상을 볼 줄 몰랐다. 들어보면 가짜뉴스에 가까운 영상 정말 많이 본다. 그런 걸 친구들 카톡방에서 서로 공유하는 것 같다. 한 번은 가짜뉴스 나한테 공유했다가 나한테 혼난 적이 있다. 나한테만 공유하지 않으면 그런 거 보는 거까지 말릴 생각 없다. 텔레비전이든 휴대폰이든 뭘 보려면 둘 중 하나만 보고, 소리라도 줄여달라는 요구를 할 뿐이다.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해놨는데 라면 먹는다고?”


기껏 밥에 반찬에 해놨는데, 라면 끓이고 있으면 정말 화난다. 엄마도 그랬던 거 같다. 엄마는 아빠 당뇨 식단을 정말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가끔 라면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 오는 아빠와 실랑이를 벌였던 생각이 난다. 나는 아빠가 가끔 라면 먹는 거까지 말릴 생각 없다. 나도 먹고 싶으니까. 하지만 밥상 다 차려놨는데 라면 끓이는 건 용납하기 힘들다. 라면 먹고 싶으면 사전에 예고를 해달라는 거다. 밥상 안 차려도 되게.


엄마 머리를 할아버지 머리로 만들어 지 마.”


내가 엄마 목욕을 시키면 아빠가 데려가 엄마 머리를 말려준다. 근데 머리를 말릴 때 빗으로 빗어서 말끔한 할아버지 머리로 만들어 놓는다.. 단정했지만 이발소에서 나온 할아버지 머리 같아서 나는 싫다: 아빠가 공들여 빗어놓은 엄마 머리를 다시 헝클어놓고 손가락으로 쓱쓱 자연스럽게 만들어놓는다. 그리고 아빠에게도 가르쳤는데 자꾸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으로 밀어놓아 잔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면 아빠는 아무 소리 안 한다. 옛날부터 지랄 맞은 딸내미를 무서워했다. 방 안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 내가 하도 지랄을 해서 아빠는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왔고, 그거 귀찮아서 결국 담배를 끊었다.


나한테 대꾸라도 잘못했다간 내가 가버릴까 봐 아빠는 두려울 거다. 남편과 딸과 떨어져 이러고 있는 나에게 미안하기도 할 것이다. 나한테 잔소리 듣고 내 눈치 보는 아빠를 보면 짠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이 살려면 맞춰서 살아야 한다. 나는 뭐든 아빠에게 맞춰주는 착하고 순한 엄마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아빠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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