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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Aug 07. 2024

냉장고 없이 살 수 있을까?

비우고 버리고 남기지 말자

냉장고가 고장 났다. 오늘이 입추라고 하지만, 푹푹 찌는 한 여름에. 냉동실에 있는 것들이 물방울을 내뿜으며 속절없이 녹기 시작했다. 처음엔 냉동실이 꽉 차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래서 조금씩 비우기 시작했고. 그런데 진짜 고장이었다. 이 더운 날에, 엄마 간병하는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요즘 말로 온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기분이었다. AS를 신청했다. 당연히 통화는 안 되고, ARS를 통해 전화번호 남기고 방문 예약하는 것까지 꼬박 이틀 걸렸다.


더운데 기다리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8월 22일로 예약되었습니다.

네??? 그렇게 늦게요? 그때면 여름이 다 끝나가는데요.

아, 지금 워낙 건수가 많아서요. 취소건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앞당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계적으로, 억지로 친절한 목소리를 쥐어짜는 콜센터 직원의 말에 짜증이 났다. 그런데 직원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그냥 알았다고 하고 황급히 끊었다. 콜센터 직원에게 짜증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일단 비워야 한다.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비상대응플랜 1번-옮기자

냉동실에는 나와 엄마가 반반 있다. 반 정도는 내가 넣은 것, 즉 정체를 안다. 반 정도는 엄마가 아프기 전에 넣어둔 것이라 정체를 모른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엄마가 처리해 주기를 바라며 건드리지 않고 기다렸지만, 지금 엄마의 상태로는 난망하다. 결국 내 손으로 해결하게 생겼다. 엄마가 넣어둔 것 중 가장 많은 게 도토리묵을 만드는 재료, 도토리 앙금 얼린 것이다. 도토리를 주워서 말려서 껍질 까서 빻아서 앙금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이 가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보관하기로 했다. 옥수수가 차 있는 냉동고로 옮겼다.


비상대응플랜 2-먹자

냉장고만 파먹어도 한 달은 먹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다. 강제로 우리도 그러게 생겼다. 우선 냉동실부터. 큰 엄마가 만들어 보내주신 손만두, 여기저기서 보내주신 떡, 엄마가 만든 쑥버무리와 쑥떡, 사촌오빠가 보내준 보리굴비 등 차례로 쪄서 먹고 있다. 얼려둔 콩은 끓이고 갈아서 국수 말아먹고, 냉장고 맨 아래칸을 차지하고 있는 토마토는 끓는 물에 데치고 갈아서 식구 수대로 한잔씩 마셨다.


비상대응플랜 3번-버리자

냉동실에서 까맣고 동그란 것이 나왔다. 블루베리인 줄 알고 먹으려다가 퉤 퉤 퉤, 뱉어냈다. 추적 끝에 아로니아라는 것을 알았다. 정성스럽게 소분해 둔 것을 보니 다른 채소들과 함께 갈아서 아빠와 함께 먹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엄마가 해준 걸 앉아서 얻어먹기만 한 아빠도, 아로니아를 처음 본 나도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 줄도 모른다. 엄마한테 가서 아로니아 어떻게 먹는 거야? 물어봐도 엄마는 눈만 꿈뻑꿈뻑한다. 아깝지만 냉장고 고장 난 김에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나도 엄마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한번 버려보니 버리는 것이 과감해진다. 김치 양념 남은 것, 나물 얼린 것, 마늘 고추 얼린 것, 청국장 남은 것, 엄마가 저장해 놓은 것들, 뭔지는 알지만 앞으로 먹을 거 같지 않은 것은 이번 기회에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엄마가 냉동실 깊숙이 저장해둔 것, 봐도 뭔지 잘 모르겠는 것, 앞으로도 알 길이 없는 것들을 버리고 냉장고를 깨끗이 비웠다. 버리고, 비우고 텅빈 냉장고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온 세상이 날 억까한 기분에서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으로 떡상했다. 이것이 비움의 미학인가. 간병하면서 알게 모르게 엄마와 아빠에게 차곡차곡 쌓인 알 수 없는 감정들도 이번 기회에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다가 없으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한 지 잘 안다. 당장 엄마가 아파 누워있으면서 나에게 닥친 고통과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고 아직도 적응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또 살게 되어있다. 한동안 냉장고가 없이 살아야 한다. 물론 김치냉장고가 있고, 냉동고도 있으니 냉장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메인 냉장고가 하나 없어진 셈이다. 지금부터 최대한 냉장고에 저장하지 않기로 했다. 반찬을 하면 그날 다 먹는 것이다. 어차피 남겨두면 잘 안 먹게 된다.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결국 버리게 된다. 가짓수를 줄이고 딱 먹을 만큼 해서 먹자. 냉장고 비운 김에, 없는 김에 가능한 하루살이처럼 살아보자. 그날 해서 그날 먹는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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