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이 필요하다
아빠가 깻잎을 잔뜩 따왔다. 정확히 말하면 본잎 곁가지로 나온 순을 딴 것, 깻순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이 많은 깻잎을 다 어쩌지.
농사를 짓거나 시골 가까이에서 살아서 여기저기에서 얻어먹을 기회가 있다 보면 왜 다양한 조리법이 생기고, 왜 저장 음식이 발달하고, 왜 절이거나 말려서 보관하게 되는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한참 오이가 그랬다. 처음 가져온 오이는 여리고 귀해서 칼도 가져오는 족족 칼도 대지 않고 손으로 뚝 잘라서 생으로 먹었다. 그다음 가져온 서너 개의 오이는 그때그때 무쳐 먹고, 그다음 한 소쿠리씩 가져온 많은 오이는 오이소박이와 오이김치를 담가 먹었다. 중간중간 오이를 절이고 물을 꼭 짜서 기름에도 볶고, 그릭 요거트로 넣고 버무려서 그리스식 샐러드로도 먹었다. 더워지면서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고 시원하게 오이냉국으로 해 먹다가, 먹다 먹다 이제 물릴 지경에 이르러 오이지를 담갔다. 그리고 밭에 따지 않고 내버려 둔 오이가 노각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오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해 먹게 되고,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으니까 저장을 하게 되더란 말이다. 이건 내가 특별히 뭘 해 먹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생기는 것을 처리하기 위해 먹을 궁리, 저장할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
이제 깻잎 차례다.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깻잎 요리는 전자레인지로 간편하게 하는 즉석 깻잎찜이다. 간장, 고춧가루, 마늘, 들기름, 통깨로 간단한 양념에 당근, 양파 얇게 채 썰어 넣고 깻잎 세 장에 양념 한 스푼씩 끼얹어 켜켜이 쌓은 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먹는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깻잎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을 수는 없다. 역시 깻순은 나물로 해 먹고, 깻잎은 장아찌로 가야 할 것이다.
엄마는 깻잎을 소금물에 삭혀두었다가 기름만으로도 어떻게 하고, 간장만으로도 하고, 고춧가루 넣고 매콤하게도 하고, 다채롭게 깻잎 장아찌를 만들어 두었다가 잊을 만하면 한 통씩 보내주곤 했다. 손이 큰 엄마가 너무 많이 보내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짜지 않고 고급스럽게 맛있다고 레시피 좀 알려달라고 해서 엄마에게 물어보면 엄마는 알려주지 않았다. 비밀 레시피라서가 아니라 만들기 번거롭다고, 엄마가 많이 해서 보내줄 테니까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끝끝내 레시피를 전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파 누워있는 와상환자가 되어 있다.
엄마도 평생 해줄 수 있을 줄 알았고, 나도 엄마가 평생 해줄 줄 알았다. 엄마의 숱한 레시피를 하나도 저장 안 해놓고 얻어만 먹다가 이렇게 많은 깻잎 앞에 멍하니 넋 놓고 있다. 엄마가 해준 김치며 장아찌를 먹을 때마다 어린 내 딸만이 할머니 돌아가시면 이 맛있는 거 누가 해주냐고, 빨리 가서 배우자고 했었다. 어린 딸도 아는 것을, 엄마와 나만 똥멍청이처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