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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Oct 25. 2024

첫사랑 용의자에게 책 빌리기

첫사랑은 실패해도 이야기는 남는다

엄마 나 해리포터를 읽어볼까 하는데…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온라인 학습을 하던 때였다. 책 좋아하고 판타지를 좋아하는 딸이 유독 해리포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약간 뒷북 느낌으로 해리포터를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눈치가 빠른 나는 직감했다. 첫사랑 용의자 X 때문이었다.


얼마 전 같은 반 엄마 모임에서 용의자 X가 해리포터 전집을 사서 완독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남의 아들 이야기가 유독 내 귀에 쏙 들어온 이유는 그 집 아들이 내 딸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애를 안다. 한참 사춘기였는지 어둠의 자식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두움을 몰고 다녔는데 또래 중에 키가 꽤 크고 꽤 똘똘해서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애였다. 딸의 이야기에는 보통 나쁜 놈으로 등장했지만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걔에게 관심이 있는 건 분명했다.


‘너 걔 좋아해?’


라고 캐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니라고 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서 걔 얘기 안 할 테니까. 나는 내 딸 첫사랑 용의자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기 때문에 끝까지 모른 채 했다. 대신 딸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X가 해리포터 전집을 사서 다 읽었다는데 빌려서 읽는 건 어때?

그건 좀…


흠칫 놀라는 것으로 보아, 싫어, 가 아니라 그건 좀…이라는 반응으로 보아 그러고 싶지만 자기 입으로 빌려 달라고 말하긴 싫다는 거다. 이때 용의자라는 딱지가 반쯤 떨어졌다.


엄마가 걔 엄마한테 빌려 달라고 말해줄까?

뭐… 그러던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것을 보고 남은 용의자 딱지도 떨어졌다. 스물세 권 전집을 한 번에 다 빌려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원래도 나는 전집을 한꺼번에 사주지 않고 한 권씩 찔끔찔끔 사주는 쪽을 선호한다. 전집을 한꺼번에 안기면 질릴 수 있고, 한 권이 끝나면 그다음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사라진다. 게다가 첫사랑에게 빌리는 건데 좀 더 낭만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 때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학교 가는 날이 있었는데 그때 한 권씩 빌려오고 동시에 읽은 책을 반납하기로 했다. 그렇게 딸과 첫사랑 X는 책을 매개로 매주 마주했다. 책을 소재로 대화가 촉발되고 책 사이에 고백 또는 연애편지가 오가는 아름다운 그림을 꿈꿨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얼마 되지 않아 걔가 다른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딸도 나에게 그 소식을 전했는데 무심한 척했지만 그 속은 얼마나 아팠을까. 짝사랑이 첫사랑으로 진전되지 않았지만 책은 꾸준히 오갔고 몇 달 만에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당시에는 절대 말하지 않다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마음이 모두 정리되고서야 그 아이를 좋아했었노라고 나에게도 알려주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걔한테 해리포터 빌려 읽자고 한 것도 그래서였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촉이 좋은 걸 알면 말 조심할 테니까. (요즘에 딸의 이야기 속에 새로운 나쁜 놈이 등장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첫사랑이 아닌데 샛길로 빠졌다. 책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 책을 읽고 구하는 다양한 채널과 경로를 만들면 좋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책을 서점에서 사서도 읽고, 도서관에서 빌려도 읽고, 친구나 부모에게 선물 받아서도 읽고, 친구에게 빌려서도 읽고 하는 식으로 풍성한 경로를 만들어주면 책은 사람과 공간과 결합되어 더욱 풍요로운 경험이 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빌려 읽을 때 책에 대한 몰입도는 사뭇 달라진다. 좋아하는 사람이 읽었던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가고, 그 사람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빌렸기 때문에 책을 굉장히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읽게 된다. 빌려온 책이니까 꼭 완독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기면서 지루함을 극복하고 완독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딸도 해리포터와 불의 잔 편이 정말 지루했지만 그에게 빌려온 책이고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참고 끝까지 읽었다고 했다. 요즘도 해리포터 얘기할 때는 X에 대한 추억도 동시에 딸려온다. X의 인기는 중학교에 가서도 여전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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