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위한 변명
홍시도 TV를 봐요?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거실 센터에 있는 TV를 보고 놀라는 경우가 꽤 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보는(것으로 알려진) 홍시네 집에는 TV가 없고 TV는 아예 안 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TV 입장에서는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 있는데 첫 번째가 TV가 가족의 소통과 대화에 방해물이라는 것, 두 번째는 TV가 책 읽기의 방해물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정확히 반대다. 함께 TV 보는 시간은 소통과 대화 시간이다. 책 많이 보는 이미지와 달리 우리 가족은 TV 앞에 자주 모여 앉아 스포츠,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꽤 본다. 지금 중3인 딸도 방에 쏙 들어가지 않고 우리 옆에서 TV를 같이 보면서 주로 웃고 떠든다. 그야말로 가족오락관이다.
많은 부모들이 책육아, TV 없는 거실을 시도하듯 나도 TV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편 때문이다. 남편이 TV를 너무 좋아한다. 남편이 TV를 좋아하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실에 TV를 없애면 남편은 스마트폰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거실에서 TV를 보는 것보다 방에 들어가서 혼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이 더 싫었다. 각자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거실에서 같이 TV를 보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집구석에서 계속 TV를 보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주말이면 자주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TV를 보네 마네 싸우게 될까봐 아예 TV가 없는 곳으로 나가면서 그 싸움을 방지하는 것이다. 보통 가까운 동네 도서관에 가거나 나가는 핑계를 위해서 주말텃밭도 시작했다. 그래도 TV를 없애고 싶은 마음은 계속 있었다. 많은 엄마들처럼 TV가 없어야 아이가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TV 없애기를 단념했다. 당장 눈앞에서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어도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다닐 때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어쩌다 우리 집에서 TV를 보게 되면 말 그대로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이 몰입해서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TV 없는 집이 많다 보니 아이들은 TV에 대한 열망과 갈증이 있었고 우리 집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 TV를 보게 되면 그동안 억눌려있던 욕구가 폭발을 하고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TV를 틀어놓아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딸과 달리 우리 집에 놀러 온 아이들이 TV를 보게 되면 불러도 대답 없고, 한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떻게든 TV를 보려고 했다. 심하게는 TV를 못 끄게 하고, 온갖 이유를 대면서 우리 집에 더 자주 오고 싶어 했고, 더 오래 있고 싶어 했다. 좋은 말로 몰입이고 나쁜 말로 하면 집착을 보였다.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욕구를 차단하고 억제시키는 것보다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거실에 TV가 책 읽기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오해다. 그래서 한때(아직도) 거실에서 TV를 없애고 서재를 만들어 책 읽는 환경을 조성하는 인테리어가 유행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환경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책 읽는 문화다. TV를 없애고 서재를 만들어놓아도 가족들이(우리처럼 가족 중 한 명이라도) 항상 책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문화가 없으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기 어렵다. 반대로 거실에 TV가 있어도 TV를 적당히 조절해서 보는 문화와 책 읽는 문화가 있다면 TV가 책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고, 심지어 TV가 켜져 있어도 책을 볼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우리 집의 경우 남편이 TV를 보고 있어도 그 옆에서 나와 딸은 책을 읽기도 한다. 우리 집 사례를 보면 가끔 TV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사례를 통해 변명을 해주고 싶었다. TV는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가족간 소통이 어렵고 아이가 책을 안 읽는 건 TV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