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책 고르기
같은 장소를 가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는 걸 좋아한다. 이렇게도 가보고 저렇게도 가보고 하면서 다양한 풍경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딸이 책을 만나는 경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단거리가 아닌 이렇게도 가보고 저렇게도 가보게 한다. 사람과 공간과 방법을 다양하게 엮어 책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우선 구매와 대여와 선물이라는 방식이 있고, 책을 구매하는 장소로는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 서점으로 나뉘고, 오프라인 서점도 큰 대형 서점, 동네의 작은 서점, 중고서점, 그리고 플리마켓과 같은 곳도 가보게 한다. 책을 빌릴 수 있는 곳은 동네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이 있고, 친구에게 빌려 읽는 방법도 있다. 책을 만나는 다양한 경로는 책 자체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경험과 재미를 부가적으로 선사하고, 자칫 생길 수 있는 책의 편식을 막아주기도 한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나 보호자, 선생님 등이 책을 골라주게 마련이고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것이 빠르고 경제적일 수 있지만, 가끔은 서점에 데려가서 직접 책을 사보게 한다. 그때마다 딸이 골라오는 책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뻔한, 내용이 허접하고 형편없어 보이는 소장가치가 없어 머지않아 쓰레기가 될 예정인 책도 많았다. 굳이 사서 읽을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아이가 서점을 돌아다니며 직접 골라온 책은 그냥 사준다. 살만한 책은 아닌 것 같고 돈 아깝지만 사주는 이유는 욕 먹을까봐 두려워서다. 직접 골라보라고 하고 평가를 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명 아이는 결국 엄마가 판단할 거면 왜 고르라고 했냐, 그러려면 엄마가 골라라, 하면서 결국 서점에도 안 오고, 평가가 두려워 아예 책을 탐색하지 않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당장은 좀 돈이 아깝더라도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패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비용을 치른다.
직접 골라 산 책은 가장 우선순위로 읽게 된다. 제목에 끌렸던 그림에 끌렸던 뭔가가 궁금하고 끌려서 산 책이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서 어땠는지 물어본다. 내 예상대로 생각보다 별로라고 고백한 적도 있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재미있다며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도 있다. 그래서 얼마나 읽어보면 별로였던 적도 많다. 이게 왜 재미있지, 왜 아직 좋은 책을 고르지 못하지, 속으로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또 나에게 책을 권하지 않을 테고, 책을 통한 소통 길이 막혀 버리는 게 싫어서 나쁜 피드백은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소위 하얀 거짓말을 보태서 그 책 재미있더라, 이런 부분이 흥미로웠어, 하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 일단 공감해주었다는 면에서 아이가 좋아하고, 또 자신의 취향을 긍정하고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십여년 간 꽤 많은 비용을 치르고 있지만 아직도 내 기준에 별로인 이상한 책을 사올 때가 있다. 왜 아직 안목이 생기지 않지? 이렇게 생각했다가 문득 내 안목, 내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 탔으니까 한강 작가의 책은 모두 좋은 책인가? 나에게 재미든 의미든 뭐든 다가와야 좋은 책이다. 아무리 허술한 책이라도 나에게 어떤 재미든 의미든 느낌이든 준다면 나에겐 좋은 책이 된다. 내 안목과 기준을 버리기로 했다. 좋은 책만 읽히고 싶은 마음, 좋은 책, 나쁜 책 이분법적인 사고를 버리기로 했다. 가령 고전 같은 인류 보편적으로 검증된 책을 사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고 경제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어차피 그런 길을 안 가기로 했으니까. 좋은 책만 읽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면 책을 어려워하지 않고 책을 고르고 사고 읽는 일련의 과정에서 훨씬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릴 때는 좋은 책만 골라 읽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읽는 습관이 훨씬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