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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Dec 29. 2022

단어 5

: 무대

  

단어 5

: 무대


     무대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예술의 장소를 무대라고 할까? 화가의 무대는 그렇다면 화가가 행위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잭슨 폴록의 그림과 같이 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방점이 찍히지 않는다면; 최소한 예술의 행위가 보여질 것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이 설명은 무대의 하나의 본질을 잊는다. 무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무대는 상연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무대는 행위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무대를 관람하는 사람을 목적으로 한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러므로 무대 위의 모습과 움직임이 '보여질 것'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무대의 최소한의 정의를 내려보자. 무대는 «보여질 것이 요구되는 행위들의 장소»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플랫폼들은 하나의 '무대'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튜브나 인스타 같은 플랫폼들은 연극에서의 무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일까?


    연극의 무대는 같은 현실의 층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여기서 '같은 현실의 층위'가 의미하는 바는 나의 '신체로서의 눈이 다른 신체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바라본다고 믿는' 즉 우리가 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층위이다. 또 달리 말하면 '내 손이 무대에서 행위하는 주체를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체가 '직접적'으로 감각한다"라는 것이 실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거칠게 정의해 보자. 연극의 무대는 관람하는 주체가 '같은'층위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유튜브나 인스타의 무대는 관람의 주체가 바라보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와 '다른' 층위일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현대의 플랫폼 이전의 영화에서부터 성립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영화에는 관람의 장소보여지는 장소를 나누는 '베일'이, 달리말해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을 쇼펜아우어가 인도사상에서 따온 마야의 베일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쇼펜아우어에게 마야의 베일은 실재를 가리는 이성의 작용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실재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사용 그 자체’가 실재를 가리는 베일이다. 이를 통해 생각해볼 때 영화에서 부터 현대의 플랫폼까지 사용되는 스크린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스크린은 '마야의 베일'처럼 실재를 가리는 역할을 할까? 아니다. 마야의 베일은 마야의 베일 너머의 것, 관람자가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 층위의 것을 '가린다'. 그러나 스크린의 관람자는 스크린 너머에 관심을 같지 않는다. 즉 스크린의 관람자에게 중요한 것은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여기'와는 '다른'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위이지 감각의 실재가 아니다. 직접성의 환영은 스크린의 존재 자체로 부터 깨진다. 그렇다면 연극의 무대와 영화 그리고 현대 플랫폼들의 무대와의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연극의 무대에서는 시선의 주체의 힘이 보여지는 것과 같은 층위에서 영향을 미치는 반면 스크린이라는 무대에서 시선의 주체의 힘은 다른 층위를 향한다».


   이 두 상황 situation에서 시선의 힘은 어떤 차이를 가질까? 연극의 상황에서 관람자의 시선은 신체와 연관되어 있다. 즉 시선의 힘은 눈동자의 움직임 눈꺼풀의 깜빡임 혹은 떨림 바라보는 이의 표정, 몸짓, 자세, 옷차림, 어떤 이의 그 순간의 분위기 등등 신체와 관련되거나 신체로부터 발원되는 모든 힘이 시선의 힘이 된다.  연극이 상연될 때 무대는 신체와 신체의 관계성 속에서 현실과 연결된다. 둘째로 스크린으로서의 무대는 신체와 다른 층위일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신체의 힘은 다른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무력해진다. 다른 층위로의 환원, 즉 스크린의 층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환원이 필요하다. 연극에서 지녔던 관람자의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지위‘보여지는 시선’으로, 즉 ‘무대 속 시선’으로 환원될 것이 요구된다. 스크린의 관람자에게는 두 힘이 선택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신체가 가진 은밀한 시선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시선이 내 신체와 ‘다른 층위의 무대’에 어떻게 영향력을 미치게하는»에 있다.


   이를 토대로 다시 정리해 보자. 연극은 ‘무대 밖 신체’‘무대 내 신체’로서 관람자의 시선이 무대 밖에 있으면서도 무대 안으로 힘이 미친다. 그러나 스크린이 무대가 될 때 시선은 무대 밖에서만 은밀한 시선의 힘을 유지할 뿐 스크린이라는 무대 안으로 침투할 수 없다. 영화는 무대 속으로 도달하지 못한 은밀한 시선의 힘만을 남겨두기 때문에 그 힘이 관람자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한다. 현대의 플랫폼은 영화와 다른 양상을 띤다고 볼 수 있는데 시선이 스크린 안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탄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신체로부터 발원하는 시선의 힘과는 완전하게 다른, 또 다른 힘이 무대 안에서 부터 환원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무대 안으로 부터 ‘봄’이 ‘보여진다’. 이 힘은 현대의 플랫폼에서 조회수나 좋아요 하트 등으로 나타난다. 이 ‘봄의 보여짐’이 현대의 플랫폼에서는 힘의 척도로서 기능한다.


   ‘무대’를 ‘보여질 것이 요구되는 행위들의 장소’라고 정의 함을 토대로 ‘시선’이 연극, 영화, 현대의 플랫폼에서 어떻게 그 힘의 양상의 차이를 보이는지 짧게 분석해 보았다. 이 분석을 토대로(혹은 이 분석들을 재검토하고 비판하면서) 현대의 플랫폼을 세분화해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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