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책상 위에 한 움큼 비친다. 떠다니는 먼지에 빛이 반사되어 반짝인다. "예쁘다"라고 생각하다 방금 청소도 하고 환기도 했는데 먼지가 아직도 있네...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창문을 다시 연다.
"먼지는 왜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어렸을 때 종종 했었다. 먼지가 있기 때문에 빛이 허공에서 산란을 하고 우리 주변이 그래서 밝은 거라는 얘기를 어른이 되어 알게 되었다. 뭐... 먼지가 우리를 밝혀주기 위해서 존재한다기보다 먼지는 각각의 먼지대로 그저 있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단어가 '빛이 머무를 자리를 주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꽤 아름다운 일이다. 빛이 먼지에 '어떻게' 머물렀다가 우리의 눈에 오는지에 따라 하늘은 푸른빛, 붉은빛도 되고 또 밤의 검푸른 빛, 회색 빛이 된다.
《사람은 먼지 같은 존재》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빛이 먼지에 비추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알 수 있게 '문화'와 '사회'가 '역사'가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잘것없이 작은 한 사람이 오롯하게 특별해지는 이유는 문화, 사회, 역사의 빛을 '얼마나'품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떠한'빛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차이다.
세상의 빛은 말투, 표정, 몸짓들에서 '어떤' 빛이 되어 누군가에게 건네진다. 그 빛이 누군가에게 낮이 될 수도 밤이 될 수도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잠에 들것 같이 부드러운 감촉을 가질 수도 날카로워져 아플 수도 있다. 먼지처럼 작지만 세상의 빛에 찔릴 수도 찌를 수도 있도록 하는 가능성이 '나'라고 부르는 이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