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아리다
삶, 마음, 욕망, 가치가 수로 환원되는 것은 그 본질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식의 지향성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구획 지으며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모든 개별적인 하나 이전에 최초의 하나로서의 현상이 지각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이 환원은 사유자체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논지로 어떠한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의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혹은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대하여 탐구한다. 이 가능성은 그 자체로 역설적 인식이며, 이 역설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 현상학의 근원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가능성은 순수하게 형상적 인식인 논리체계로서 가능하지 않으며 의식이 그 자신의 출발점인 지각의 물질로서의 '인상 impression'으로 회귀하여야 한다.
감각적 인상으로의 회귀는 그러므로 '의심'이다. 그러나 이 의심은 감각적인 인상을 배제하여 주관성과 괴리된 보편 타당성을 얻는 의심과 다르며 오히려 이것은 '삶의 증상(symtôme de la vie)'으로서의 의심이다. 따라서 이 의심은 발자크가 『미지의 걸작』에서 썼던 «부끄러움(Pudeur)은 아마도 의심일 것이다.»의 부끄러움으로서의 의심이다.
이 '부끄러움'은 감각적 의심으로서 어떠한 의식 혹은 판단에 대한 자신의 물러섬과 자신의 무력함을 지각하는 능력이며 지향적 판단을 재고할 것을 요구하는 삶의 증상이다.
'헤아리다'는 이 감각적 의심이 그 의미에 스며든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헤아리다'는 '수를 세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마음으로 그 수를 가늠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셈하여 보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 셈하는 방식이 차갑게 느껴지는 반면 '마음을 헤아리다'라는 표현은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아마도 이유는 이 헤아림이 마음에 대한 지성적인 작용과 이 지성적 판단에 대한 감각적 의심을 동시에 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감각적 의심의 본질은 타자의 마음에 다가가며 함께 있음을 조용히 알리고자 하는 것이지 타자의 마음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대한 분석의 한계에서 자신의 물러섬(그러므로 근원적 인상으로의 회귀)
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헤아림'의 실천의 한계는 이 감각적 이성의 크기를 나타낸다. 즉 판단하는 능력이 실패하는 자리에서 감각적 이성이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