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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06. 2022

단어 1

‘오롯이’와 오로지

단어들



단어 1: ‘오롯이’와 ‘오로지’


오롯이

「부사」

1.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2. 고요하고 쓸쓸하게.


오로지

「부사」

1. 오직 한 곬으로. 전혀.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한 두 달 전쯤, 그러니까 8월쯤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어느 구절인가는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문장 2’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는 글에도 다루고 있는 ‘소외’를 다루는 부분 즈음을 읽으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일상에서의 소외’는 ‘모두와 함께 있으면서도 정작 나는 진정으로 거기에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모두와 함께 있는데 왜 나는 내 존재를 잃어버린 것 같을까?”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이 ‘자신’으로 부터 소외되어있음을 알게 될 때가 아닐까? 그러면 이런 질문은 어떤 구조로 떠오르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며칠 동안 하고 있던 중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다시 책을 보았다. 읽는 중에 ‘오롯한’, ‘오롯하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오롯함’이라는 단어는 느낌이 참 묘했다. 처음 든 이미지는 호롱불 하나가 시골집(왠지 작은 할머니 집의 배경과 닮았다)의 조그만 방에서 일렁이는 모습이었다. 어둑함과 함께 미미하게 일렁이는 모양. 다음에 떠오른 이미지는 별이었다(별은 사실 쉽게 생각나는 이미지라서 호롱불이 먼저 떠오른 게 내심 뿌듯했다). 밤하늘에 몇 개 보이지 않게 떠있는 별.

    ‘오롯이’와 비슷한 단어인 ‘오로지’도 함께 떠올랐다. ‘오로지’, 뭔가 결단에 차있는 느낌의 단어다. ‘오롯’, ‘오로지’의 모양은 비슷한데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까?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어려서부터 느껴왔기 때문일까? (오롯 이에서 ‘오롯’만 떼어서 생각해보았는데 ‘오로지’는 그 단어를 분리할 수 없는 듯하지만 ‘오롯이’에서는 부가적인 ‘이’를 떼어내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롯’은 ‘ㅅ’이 ‘로’라는 단어를 높이 올려주는 것 같다. 그런데 독수리처럼 비상한다던지 경주마처럼 앞발을 휘두르며 서있다던지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작은 동물이 더 작은 뒷발로 버티고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양이 더 알맞을 것 같다. ‘오로지’는 위로 솟는다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 같다(오롯과 비교해서 보면 그런데 사실 ‘오로지’만 보면 특별한 모양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혼자 좀 더 생각해보려고 커피를 마시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면서 ‘오롯’의 발음을 내뱉어 보았다. 오롯, 오롯… ‘오’는 입이 둥글게 모이고 숨이 그 동그란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센 바람이 나오지는 않는다. ‘롯’에서는 ‘오’의 약한 날숨에 ‘로~’하고 발음하여 입천장에서 아래로 혀를 내리며 바람이 살짝 더 불도록 부채질을 해준다. 그런데 ‘ㅅ’ 발음은 ‘로’를 발음하면서 내려갔던 혀를 다시 위로 올리며 날숨이 지나가는 길목을 막는다. 길목이 닫히며 매우 짧은 순간 날숨의 바람이 혀끝에서 강해졌다가 이내 멎는다. ‘무언가 연약한 것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강렬했다가 이내 스러지는 듯 한 이미지’. 문장부호를 사용해서 발음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오-롯-/, }

   오로지는 위에서와 같이 ‘오’에서 약한 숨으로 내뱉어지는 바람이 ‘로’에서 조금 힘을 얻는다. ‘지’는 입꼬리가 옆으로 눌리고 이빨이 살짝 다물어지면서 비교적 굳센 소리가 난다. ‘오로’까지는 천 같은 것 따위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에 그친다면 ‘지’는 입의 근육으로 소리를 누르는 의지가 필요한 소리 같다. 한낱 펄럭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의지를 가진 깃발이 되어 나부끼는 이미지. 이것도 문장부호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오-로-지\-  }


   카페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렇게 골똘히 “오롯”, “오로지”를 조그맣게 한참 발음하면서 생각하다가(위에는 많이 정리가 된 생각이지만 실제로는 안 그래도 생각들이 엉키는데 새로운 생각들이 끼어들어서 머릿속을 정리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생각이 잡혀버릴까봐 바로 찾아보지 않았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오롯이’의 첫 번째 뜻은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두 번째 뜻은 ‘고요하고 쓸쓸하게’.

   오로지의 뜻은 ‘오직 한 곬으로’.


‘오로지’의 정의 분석


  사실 ‘오로지’는 ‘오롯이’를 생각하기 위해서 같이 생각해보는 단어였다. 그런데 사전에 정의된 단어의 뜻풀이가 생각보다 예뻤다. ‘오직 한 곬으로’. ‘곬’‘한쪽으로 트여 나가는 방향이나 길’을 뜻한다. 여기서 ‘트여 나간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먼저 ‘트이다’는 ‘앞이 트이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막혀있던 것이 열리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나가다’는 신체 혹은 정신이 전진 en marche 하는 것이다. 이 합성어는 단어가 행해지는 순서에 따라 두 가지로 이해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트임 뒤에 ‘나가다’라는 행위가 수반되는 것이다. ‘곬’이 이미 ‘트여있는 상황 situation’은 ‘나아감’이라는 행위가 행해지는 장소가 된다.

   두 번째는 ‘나아감’이 ‘트임’에 앞선 형태이다. 이 경우에는 ‘트임’은 ‘나아감’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 évenement 이 된다.


두 가지 ‘트여 나가다’의 가능성을  걷는 것으로 비유를 해보자.


 1. ‘트이다’가 ‘나가다’에 선행함: 나의 발걸음을 놓을 장소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에게 앞서 이미 위치해 있는 s’est situé 길이다. 이 길은 내 앞에 이미 펼쳐진 상황 situation이다. 그러니까 상황 속에서 나아감은 나의 ‘위치 지어짐 me situer’과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가능성의 장소 lieu de la possibilité’가 선행된 상태에서 ‘나아감’을 의미한다.

2. ‘나가다’가 ‘트이다’에 선행함: 나의 발걸음을 놓을 장소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의 장소’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사건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évenement 혹은 영어로 event는 라틴어 evenio에서 온다. ‘Evenio (e; 밖 + venio;오다)’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다. 트여나가다의 해석에 적용해보면 사건은 상황 혹은 가능성의 장소 바깥(e-)에서 오는(-venio), 주어진 상황에게 새롭게 도래한 것이다. 즉 사건은 상황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때 발의 움직임 자체가 걸음의 장소가 된다.


이제 또다시 ‘곬’‘오직 한 곬으로’의 차이를 분석해보자. 오로지의 정의에서 ‘곬’에는 두 겹의 한정사가 붙는다. ‘오직’과 ‘한’. 수식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오직 (한 (곬))}. 먼저 ‘곬’은 ‘하나’로 한정된다. ‘곬’의 ‘여러’ 가능성중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오로지’의 발화자로부터 ‘선택’된다. 그러나 ‘하나의 곬’ 혹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곬))으로 수식된 것에 ‘오직’이 또다시 수식된다. ‘한 곬’은 여러 곬중 하나의 곬을 의미할 뿐이지만 ‘오직’은 ‘여러 곬들’을 금지하고 ‘하나’의 가능성만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오로지의 발음을 해부하고 은유하여 얻은 이미지를 상기해보자. “한낱 펄럭임이 의지의 깃발이 되는 것”, 이 깃발을 내리꽂은 장소만이 가능함이 허용된 장소이고 펄럭임이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장소다.


오직 한 곬으로의 두 가지 해석 :

1. 트이다가 나가다에 선행하는 ‘오직 한 곬으로’: 가능성의 장소 lieux de la possibilité( 나아감이 가능한 여러 장소 le pluriel de lieu: lieux )가 선행되어있다. 하지만 오직 ‘한’ 곳을 제외한 다른 장소를 배제하고 ‘하나’의 가능성의 표지(혹은 ‘하나의 의지’)만을 허용한다.

2. 나가다가 트이다에 선행하는 ‘오직 한 곬으로’: 이때에는 ‘나아감’ 자체가 ‘트임’이 되는 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아감 자체가 트임이 될 때 나아감은 ‘가능성의 무한성’ 앞에 직면해 있다. 선택지가 무한(infini)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제한(fini)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in-)는 것이다. 선택지가 무한하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여기서 가능성이 생성되는 무한은 ‘1,2,3,4…’, ‘무한 소수’ 등에서 나타나는 ‘가 무한 potential infinity’이 아니라 어떤 ‘수’나 ‘언어’로도 한정될 수 없는 ‘실무한 actual infinity’을 말한다. 장소 lieu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 순간에 일회적인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한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 때 ‘하나의 상황’이외의 ‘상황이 될 수 있었던 무한성’은 배제된다. 다른 즉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d도 아닌 a를 선택하는 것이 행위의 가능 조건이다. 다시 말해 행위는 필연적으로 제한을 의미한다(제한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fini는 fin과 그 어근을 같이하는데 목적,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무한한 선택지’라는 개념은 행위의 가능 조건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도피할 수 있는 영역은 장소의 부정으로서의 장소뿐이다. 즉 ‘비-장소, atopos(아토포스)’다. ‘비-장소’에서 행위함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불가능성만을 말할 수 있는 현재의 분석에서 남는 것은  비-장소를 사유하고 가능성을 생성하고자 하는 ‘오직’의 의지뿐이다.


정리하자면 ‘오로지’는

첫째: 트이다’가 ‘나가다’에 선행하는 ‘오직 한 곬으로’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생성하는 ‘오직’의 의지 작용이다. 

둘째: ‘나가다’가 ‘트이다’에 선행하는 ‘오직 한 곬으로’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생성하는 ‘오직’의 의지 작용이다.


‘오롯이’의 정의 분석


오롯이  번째 의미는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이고  번째 의미는 고요하고 쓸쓸하게이다. 무엇이 모자람이 없을  있을까?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이 풍부하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들 채워져야 모자라지 않게 되는 것일까? 사랑? 사랑은 과연 채워지는 어떤 양을 지닌 것일까? 사랑은 셈하기의 영역을 벗어난 관계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은 같은 단어, 같은 발음으로 말해질지라도 언제나 그때마다 새로운 고유명으로서 재명명되어야 하는 새로운 사건의 이름이다. 사랑은 양이나 질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관계의 -장소적 유일성과 고유성에 관련되어 있다. (*사랑에 관한 주장은 충분하지 않게 생각되었고 직관적인 도약이 많은 주장이기 때문에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생각해본다면 사랑은 채워진다 혹은 충만해진다 등의 양적인 정도를 나타내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여기서 이끌어   있는 생각이 있는데 모자람이라는 것이 필요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것이라면  필요의 정도에 부합하거나 넘칠  ‘모자람 없다라고 말할  있는 것이라면 필요의 부재는 ‘모자람이 없게한다.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는 주체 어떠한 모자람도 허용하지 않는다.


‘온전하다’

온전하다는 말의 정의는 ‘본바탕대로 그대로 있음’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떠한 것에 ´본래 바탕이 되는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영혼’이 그 본바탕이다”라고도 대답할 수 있겠지만 영혼을 해명할 수 없다면 그 대답을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인식 가능한 것을 생각해보자. 앞에서 ‘어떠한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무작위적인 존재자‘어떤 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은 항상 ‘어떤 quelque’것이다. 즉 ‘어떤 것’은 항상 어떠한 방식 quelque manière 으로든 존재한다. 여기서 온전함은 이 방식의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방식 manière’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렇게 ‘어떤 것의 어떠함’을 말하는 것은 무한한 세계의 변화를 ‘어떠함’의 틀에 고착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될 때 변화의 무한성은 제한되며 더 이상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의 어떠함quelque manière de quelque chose’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양태 modalité de l’étant도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더 근원적으로 가보자. 라이프니츠의 질문을 생각해보자. «Pourquoi y a-t-il quelque chose plutôt que rien(왜 어떤 것이 없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은 사유를 하는 사람을 전적인 무지로 이끌어 가는 질문이다. ‘없는’ 것이 아니고 왜 ‘있는’ 것인가? 무언가 ‘있다’라는 실재 real. 이 질문에 직면할 때 있음의 사실 이외에 어떠한 방식 manière 혹은 양태 modalité도 부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존재의 비-방식 성 혹은 비-양태성이 존재의 양태라고 볼 수 있다.

온전하다를 따라서 ‘있는 그대로 있음’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있음은 ‘그대로 있음’의 사실만을 알려주며 어떤 방식도 어떤 양태도 갖지 않은 채로 있다. 이렇게 방식과 양태를 부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은 ´있음의 사실’전적으로 무지한 상황에 근거한다. 이 ‘무지함’은 있음의 무한성의 근거가 된다. 즉 무지함의 한정할 수 없는 무력함의 근거로 무 in 한정 fini 한 무한 infini을 사유할 수 있다. 즉 ‘있음’에 대한 전적인 무지함으로부터 사유하는 주체는 무 in 한정 fini 하게 무한 infini를 사유하는 주체이다.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앞서의 결론을 정리해보자

1. ‘모자람 없이’의 주체는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는 주체’이다.

2. ‘온전하게’의 주체는 ‘무지함으로 무한을 사유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모자람 없이 온전한’, ‘오롯한 주체’는 ‘어떤 이’를 말하는가?


‘모자람 없이 온전한’ 주체


1.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는다.

2. 어떤 것의 ‘있음의 실재를 질문하는 주체다. “어떤 것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3. 있음의 실재를 답하는 것에 전적으로 무력한 무지의 주체다.

4. 무지함으로 어떠한 것도 한정(fini) 하지 않기 때문에(-in) 무한 infini를 사유할 수 있는 주체다.


그러나 무지함을 사유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유는 무엇을 알기 위한 행위가 아닌가? 이에 대한 가능성은 “나는 어떻게 모르는가?”라고 질문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다시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였던 것을 다시 사유에 도입해야 한다. 무한을 사유하는 무지의 주체는 자신의 무지의 방식과 양태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다. 무지를 향한 길로서 사유의 절차를 밟는 것을 ‘오롯함’으로 향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요하고 쓸쓸하게’

위에서 정의한. ‘무지의 주체’가 오롯이 온전하다. 앞서 잠깐 사랑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랑’은 양적인 것도 질적인 것도 아니라고 하였고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명명하는 이름이라고 말하였다.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표현 중에서 아주 미스테리한 표현을 들어보자.

“나는 너를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 진부한 표현이 미스테리한 이유는 사랑하는 이유를 사실상 어떠한 것도 언급하지 않음에 있다. 실상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 나이, 학벌, 이름 등의 그 사람의 특성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지 않고 ‘너’ 혹은 ‘당신’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을 모두 빼버리게 되면 ‘그’ 사람이라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너’의 이러저러한 점을 좋아하게 되어 ‘너’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이렇게 ‘너’를 좋아하게 된 특성조차도, ‘사랑’에 이르는 관계의 고양 속에서 중요하지 않음을 느낀다. ‘너’의 존재만이 중요하게 된다. 사랑을 하는 주체가 사랑의 이유에 대하여 진지해지게 되면 그 이유를 말하기 당혹스러워진다. 그 이유는 이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 대한 당혹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사랑의 이유를 말함좋아함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 불일치 함을 느끼게 되는데 좋아함은 항상 존재하는 것의 이러저러한 특성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그 존재함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그 있음의 실재’는 사유하는 주체가 좌절하는 자리다. 있음의 실재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다음과 같다. 분명히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데 이 확신을 설명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당혹감이다. 사랑의 이유를 말함에 있어서의 충격 또한 마찬가지로 분명히 나는 ‘너’의 존재함 그 자체를 사랑하는데 너의 존재에 부여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다는 당혹감이다. 이 현상은 의식적 주체가 사랑하는 상대방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인식적인 입장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타자로서 존재한다. 이 좌절 혹은 단절에서 주체는 비로소 오롯이 홀로 될 수 있다(그렇지만 사랑이 주체가 오롯이 홀로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면서 왜 홀로 됨을 말하는 것일까? 오롯이 홀로 된 주체만이 사랑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롯이 홀로인 주체만이 오롯이 홀로인 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의 아름다운 명제를 빌리자면 사랑은 하나가 됨이 아니라 둘의 사랑이다. 나와 네가 오롯이 홀로일 때 내가 너의 구조에 녹아내리거나 네가 나의 구조의 녹아내리는 ‘하나’로의 환원을 막을 수 있다. ‘너’는 ‘내’가 되고 ‘너’도 ‘내’가 됨의 환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의 어떠한 특성도 중요해지지 않으므로 더 나아가 인식되지 않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하나 됨의 환상이 유지될 때와 깨어질 때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 됨의 환상’이 깨어질 때 ‘너’를 ‘나’의 동일성으로 환원(사디스트적 욕구)하려는 욕구를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정당하게 생각한다(‘너’는 ‘나’였기 때문에). 환상이 유지될 때는 낭만주의적인 사랑에 자기 자신이 용해되어 없어진다(‘나’는 ‘너’이기 때문에). 즉 나의 주체를 너로 환원하고자 하는 욕구(마조히스트적 욕구)로 발현될 위험성이 있다. 정리하자면 “너는 나였는데 왜 지금은 다른 사람인 거지?”라는 의문을 갖거나 “나는 너”라는 확신을 가진다. 첫 번째 욕구는 상대방을 나의 기준에 맞추기를 갈망하고 두 번째는 나를 버리고 헌신하여 너에게 바치기를 소망한다. ‘사랑의 하나 됨’이라는 환상은 이 두 가지 의문에 사로잡힐 때 전쟁이 된다.  때문에 사랑의 하나 됨에서 ‘오롯이 홀로일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이라는 책에서 “사랑은 무릎 꿇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무릎 꿇게 하는 것도 무릎을 꿇는 것도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두’ 주체의 오롯한 홀로 됨을 전제한다.


 결론: 오롯이 홀로인 주체는 ‘너’라는 무한 앞에선 ‘하나’의 주체다. 그 역도 마찬가지로 ‘네’가 ‘나’를 사랑할 때 ‘너’는 ‘나’의 무한을 발견하는 주체로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하나’와 ‘하나’는 서로의 ‘무한’과 ‘무한’을 보전하면서 둘일 수 있다. ‘고요하고 쓸쓸함’은 ‘언제나 함께 있는 가운데 나의 없음’이라는 일상의 소외 속에서 벗어나 ‘서로의 무한 앞에 오롯이 홀로 된 주체’의 고요함과 쓸쓸함이다.  


마치며 

이 오롯이 와 오로지의 분석에서 내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첫째는 ‘오로지’의 분석에서 얻어낸 정의와 ‘오롯이’의 분석을 다시 서로 맞대어 생각하면서 ‘오롯이 홀로 있는 주체’의 여러 가능성을 포착해내는 것이고 둘째는 ‘오롯이 홀로 있는 주체’가 사랑 이외의 다른 절차에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생각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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