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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나를 자꾸 대인배로 만든다

by 휴지기

'아픈 만큼 성장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예전부터 아프지 않고 성장하지도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한데 굳이 성장해야 하는 건가, 평생 철없이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아픈 게 싫었다. 몸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너무 싫었다. 물론 아픈 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나는 정말, 진심으로, 아프지 않았으면, 그래서 성장하지 않고 그냥 고만고만하게,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친한 직장 동료가 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내 남편의 이야기를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내비치고 있는 동료.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일은 다행히 잘 마무리되었다.) 그 동료가 말했다.


"자기 남편 덕분에 자기가 대인배가 되어가고 있네. 큰일을 끊임없이 빵빵 터뜨려주니 여기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소하게 느껴지잖아."

"아우, 이런 대인배 너무 싫어요. 나는 착한 소인배로 살다가 죽고 싶었는데."


실제로 나는, 나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 보는 일이 아니라면 직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정말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주변에서 왜 그걸 받아주냐, 이런 것까지 해주면 니가 손해인 것 모르냐 이런 조언들을 종종 듣곤 하지만 내 시간 조금 투자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스트레스받으면서 거절하기보다 그냥 내가 하고 마는 게 마음 편하다. 그래서 나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신경전과 시기, 암투 등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남편이 자꾸만 커다란 일들을 빵빵 터뜨린다.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일들, 당연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다. 남편은 일을 터뜨리고 일을 이미 터져버린 일을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더 쓸쓸해지고 더욱더 가난해진다.


이런 남편 때문에 내 아량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티 내지는 않지만 질투가 심하고 남의 작은 행동 때문에 마음이 쉽게 불편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남들이 다 욕하는 사람도, 이유가 있었겠지, 아니면 몰라서 그랬겠지 하고 그냥 넘겨줄 수 있는 아량이 생기고 있다.


물리에 부쩍 관심이 생긴 초등학생 아들이 나에게 작용 반작용에 대해 물어왔다.


"엄마, 내가 벽을 밀면 벽도 나를 미는 거, 그게 작용 반작용 맞아?"


아들이 말한 물리학 법칙이 나의 인생에도 적용되고 있는가 보다. 남편이 사고를 치면 나는 그만큼 대인배가 된다. 남편이 내 속을 썩이면 내 아량의 더 커진다. 이제 그만 좀 커졌으면 좋겠다.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성숙했으니 이제 그만, 적당한 소인배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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