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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고 비루한 이야기

by 휴지기

"아주 안 좋은 일이 있어."


퇴근길에 전화기 너머에서 남편이 한 말이다. 나는, 한낮의 열기 때문에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찬 차의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뭔데?"


남편이 뜸을 들였다. 무슨 일일까 두려웠다. 이미 최악인데 더 최악이 있을까 싶지만 언제나 남편은 나의 상상을 벗어나는 사고들을 쳐왔다. 지금이 최악인 줄 알았는데 더 최악이 있는, 충분히 어두운 줄 알았는데 더 막막한 어둠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불안하고 두려웠다. 내심, 남편이 장난을 치는 거였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들었다.


남편은 아주 안 좋은 일이라는 말을 한 번 더 한 후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말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좋지 않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평이하게 느껴질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남편의 많은 일들처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 고스란히 앉아서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일, 다른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부르는 일, 그런 일이었다.


남편의 말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아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아이 저녁을 차려주고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아무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했다.


"충격적이고 비루한 이야기를 할 거야. 들을 수 있겠어?"


친구는 남편 이야기임을 눈치챘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울었다. 나는 내 이야기로 종종 사람들을 울린다. 정작 나는 울지 않는다. 울컥, 하는 순간이 있지만 이상하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울컥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아니, 울지는 못했다. 나의 충격적이고 비루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인데도, 이 친구 앞에서 울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아무에게도 음성으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 이곳에 활자로만 드러냈던 이야기들, 연체와 사채, 가난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했다. 친구는, 결혼할 때부터 내가 결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마뜩잖아하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친구는, 나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오래 침묵했고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아무 말하지 못하고 친구도 아무 대답 하지 못했던 침묵의 순간, 말을 잃었던 순간들이 잦았다.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잊으라고 했지만 친구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나의 불행으로 친구를 힘들게 한 게 아닌가 싶지만, 나의 불행을 누구에게든 이야기해야 그래야 나도 버틸 것 같았다.


37도가 넘는 무더위에 남편이 야외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은 나에게


"나 일하는 거 보면 자기 눈물 날 거야."


라고 말했었다. 남편의 해진 낡은 속옷을 보면서, 땀으로 색깔이 변한 작업복을 보면서 남편이 불쌍했다. 서너 시간 자고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울산에서 경기도로 바로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 원망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언젠가는 결실을 보겠지, 언젠가는 편한 날이 오겠지 막연히 기대하며 버틴 시간들이 십 년이다.


이제는 모르겠다. 그 '언젠가는'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든다. 남편과 이혼하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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