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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희망

by 휴지기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바닷가 근처 아파트라 많은 시간 해무 속에 잠겨 있었다. 창문 밖으로 우유 같은 안개가 가득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도로도, 학교 단지도, 다른 아파트들도,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만 동동 구름 속에 떠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안개가 끼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어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 안개가 곧 걷힐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비구름이 지나가 그 뒤에 있던 햇빛이 비추면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 그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안개는 곧 걷힌다, 겨울은 언젠가 끝난다, 이 또한 결국은 지나간다, 이런 당연한 사실들. 그래서 진실인 것들을 믿으며 우리는 살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살았다.


내가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 중 하나는, 일을 하면 대가를 얻는다는 것이었다. 내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뭔가 일을 하면 그 대가를 받아 내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누일 곳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자연의 이치 같은, 진실었다.


그런데 그런 자연의 이치였던 것들이, 나에게 진실이었던 것들이 결혼과 함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일을 했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편은 대가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일에 쏟으면서 돈도 같이 쏟았다. 남편은 원래 가진 게 없었으므로 빚을 얻어 돈을 쏟았고, 남편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나에게까지 빚을 얻게 해 돈을 쏟았다.


남편은 지금도 경기도에서 주 6일의 근무를 하고 있다. 4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두 달 반째이다. 그런데 한 번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결혼 전에 살던 세상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일을 하고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건, 심지어 죽을 만큼 열심히 일을 하고도 두 달 반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어 또 꾸역꾸역 일을 나가야 한다는 건 말이다.


남편이 경기도로 올라가고 두 달 남짓은 나에겐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아이의 과학 학원 말고는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는 주말을, 아이와 단 둘이 고요하고 외롭게 보내는 시간들이었다. 이 시간들을 보내면서 남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남편이 경기도로 올라가기 전에도 나는 아주 많은 일들을 아이와 단 둘이 겪어내야 했다. 남편은, 언제나,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에 몰두하느라 가족인 나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없다고 하여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요리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이에게 냉동식품을 조금 더 먹이게 되었고 나도 끼니를 잘 챙겨 먹지 않아 살이 조금 빠지게 되었다는 게 가장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였다.


그뿐이다. 아이는 아빠를 찾지 않는다. 다만 며칠에 한 번씩, 아빠가 만들어준 김치찜이 먹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멍청하게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을 하면 대가를 받는다는, 나에게는 당연하고도 당연한 사실에 대한 믿음을, 그리하여 늦더라도 남편이 자신이 일한 대가를 꼭 가져오리라는 희망을, 어쩌면 헛될 수 있는 그 희망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겠다. 어느 순간, 햇빛이 비쳐 안개가 물러가는 순간처럼 우리에게도 햇빛이 비치는 순간들이 오리라는 것을, 그 믿음과 희망을 놓지 못하겠다.


어제저녁때는 아이의 영어 학원에서 발표회가 있었다. 우리 아이는, 난생처음 부모들 앞에서 영어 발표를 하게 되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아주 잘했다. 어떤 아이보다도 잘했다. 저번주 평일 저녁에 내려왔다가 그다음 날 새벽 2시 반에 올라가서 바로 출근한 남편은, 이번 주에는 내려오지 못했고, 그래서 아이의 영어 발표를 보지 못했다.


남편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는 빠르게 자라고 있다. 아이가 크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죽을 만큼 하는데도 언제나 죽을 만큼 힘든 남편이 불쌍하고, 많은 화창한 주말에 놀러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 있는 아이가, 아빠의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가 불쌍하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인생 걸 걸었지만 내가 걸었던 모든 것들이 힘없이 사그라드는 걸 아무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내가 제일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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