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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에 남은 것들

by 휴지기

경기도로 일하러 올라간 남편이 집에 내려오지 않은 지 2주가 되었다.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문자를 보내놓은 지는 일주일이 지났다. 남편은 답장이 없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혼 이야기를 꺼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분기별로 한 번씩은, 연례행사처럼 이혼하고 싶었고, 참을성이 없는 나는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깊게 들 때마다 그걸 기어이 말로 내뱉고 말았다. 남편은, 내 이혼요구를 듣고 화를 낼 때도, 사과를 할 때에도, 못 들은 척 넘어갈 때도 있었다. 또 한 번 물론, 결혼 내내 나만 이혼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도 아주 가끔씩은 이혼을 이야기했었다. 나는 남편의 이혼 요구를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하고 조금은 두려웠던 것 같다. 남편이 죽을 만큼 미웠지만 진짜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그때는, 예전에는 말이다.


남편이 없이, 아이와 함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나와 같이 내향적인 성향이라 밖에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아이가 주말마다 놀러 가자고 말했으면, 이렇게 날씨 좋은 주말에 아이와 단 둘이 집에 있는 것이 아주 불행하고 무료하게 느껴졌을 텐데 아이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아이는 수박이나 민트초코칩쿠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아이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으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내향적이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나는, 지금은 아이가 있어 별로 외롭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와 단 둘이 사는 것도 크게 힘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면서, 결혼 후에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선은,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말랑말랑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우리 아이. 아이가 있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이렇게 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을 닮은 풍성한 머리숱과 뽀얀 피부, 큰 키와 여린 입술을 아이는 갖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기억.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결혼 생활 중 남편이 부재한 순간이 너무 길었고 그 순간들 나는 계속 기다리면서 애달파하고 불안하고 외로웠다. 자주, 많이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들이었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장면들도 많이 있다. 남편은 나를 자주 안아주고 업어주었으며 사랑한다고, 그리고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이혼하려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의 박복함, 어쩌면 경제적 무능 때문이다. 남편 옆에 있으면 나는 평생, 돈 때문에 동동거리고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원래 돈 개념도 돈 욕심도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남편 옆에 있으니 계속 돈돈 하게 된다. 생존은 해야 하니까, 어떻게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이제는 이런 비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편과 헤어진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더 비루해지고 더 남루해질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더 막장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이제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도 남편이 별로 그립지 않다는 것. 헤어질 마음이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남편에 대한 마음이, 그게 애정이든 미움이든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것. 눈에서 멀어진 만큼 마음에서도 부쩍 멀어지도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은 애정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마이 허즈번드에 대한 나의 애정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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