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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한 번은 가져볼 좋은 날

by 휴지기

긴 연휴다. 남편은 토요일인 그저께 집에 내려왔다. 일을 마치고 오후 3시 조금 넘어 경기도에서 출발한 남편은 집에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다. 경기도에서 충청도까지 차가 말도 못 하게 막혔다고 했다. 50km를 움직이는 데 네 시간도 더 걸렸다고 투덜댔다. 나는 너무 힘들면 휴게소에 들어가서 쉬다가 오라고 하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연휴라서, 사람들이 다들 어디 놀러 가나 보네."


'긴 연휴, 나도 어디라도 놀러 가고 싶은데 너 때문에 못 가고 있다.'는 원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는데 눈치 없는 남편이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혹은 다 알아들어놓고 모른 척 의뭉을 떨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말에 교묘하게 꽂아 넣은 가시를 남편이 알아채지도 못하고 훅 넘겨버린 건지, 목이 찔리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긴 건지 모르겠다.


남편이 집에 도착하고 맥주를 한잔씩 했다. 남편이 말했다.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우리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50대 중반인 형님이 있는데 그 형님이 나보고 자기 또랜 줄 알았대. 그리고 또 나보다 한 살 많은 형님이 있는데 그 형님도 나보고 한참 형님인 줄 알았대. 또 누구 있었는데, 암튼 그 사람도 나보고 50대인 줄 알았다드라."

"좋냐? 근데 오빠가 그렇게 늙어보인대? 피부는 괜찮은 거 같은데."

"머리가 하야니까. 다들 피부 관리 잘한 50대라구 생각하드라구."

"참나.... 오빠 볼 게 얼굴밖에 없었는데. 얼굴도 다 삭아서 어떡해."

"공사판이 다 그렇지 뭐. 햇빛에서 일하니까 얼굴도 다 타고."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 13년 전에는 남편이 잘생겼었다. 물론, 여러 번 밝힌 것처럼 일제강점기 병약한 지식인 같은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훈훈했었다. 셔츠에 니트, 면바지를 입고 있으면 어디에 있든 꿇리지 않는 깔끔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그런 남편이 세상 풍파를 직격으로 맞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 40대에도 50대처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몇 살로 보이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외모가 아니라, 자신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것, 그리하여 결국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집 앞의 남성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왔고, 내가 염색을 해 주었다. 하얀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염색을 해 주었지만, 원래 손재주가 없고 꼼꼼하지 못한 나는 염색약을 남편 이마에도 귀에도, 목에도 묻혔다. 심지어 짧게 친 구레나룻 쪽에는 염색약이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매우 이상하고, 웃겼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괜찮아, 몇 번 머리 감으면 없어지겠지.'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50대처럼 보이던 40대의 남편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하니 조금은 젊음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예전의 그 훈훈함은 되찾지 못했다.


결혼하고 남편이 많이 늙었다. 물론 나는 더 많이 늙었을 수도 있다. 남편은 남편의 선택 때문에 망했지만 나도 남편의 선택 때문에 망했다. 남편이 나에게 갖고 있는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 내가 남편에게 갖고 있는 가장 큰 감정은 원망일 것이다. 나는 종종, 진심으로,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조금은 덜 비루하게 살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상상해 본다.


오늘은 어린이날,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들에게 선물 하나 사줄 돈이 없는 남편은 오늘 하루 아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자전거를 타고 볼링을 치고 오락을 했다. 이따가는 미나리전과 골뱅을 무침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일하러 사무실에 나갔다.


세상 누구보다, 정말, 진실로 세상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효율성이 떨어져, 박복한 팔자를 타고 나 와이프인 나를 미치도록 힘들게 하는 남편이기도 하다.


오늘도,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날을, 하지만 언젠가 꼭 한 번은 가져볼 좋은 날을 기대하며 또 하루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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