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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살아있어

by 휴지기

이번 주도 여전히 힘들었다.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처리해 내는 일의 속도가 부쩍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한 일에 믿음이 가지 않아, 이미 끝낸 일을 계속 복기하고 확인하느라 일은 더 늦게 진척되어 갔다. 그 일을 했을 때의, 과거의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해 꾸준히 불안하고 자주 후회했다.


어젯밤 남편과 통화할 때였다. 금요일 저녁, 몸과 마음이 한껏 지쳤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던 나는, 가뭄에 곧 말라죽을 풀처럼 축 처져있었다. 나는 활력이 갈급해 남편에게 물었다.


"뭐 좋은 일 없어?"

"좋은 일? 글쎄.... 나 여기서 인정 많이 받고 있어."

"아니 그런 거 말구"

"그럼 뭐?"

"지금 당장 좋은 일. 뭐, 돈이 나왔다든가 하는, 나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거 말이야"

"으음.... 나 아직 살아있어."


풋,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목도 아프고 뭐 궁금한 것도 별로 없었다.


어제는, 설거지를 하고 조금 쉬다가 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이 학원 때문에 택시를 불러 타고 이동하면서, 택시 뒷자리에 앉아 가로수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연둣빛 이파리들을 담뿍 담고 있었다. 어쩜 저 나무들은, 도로 옆에 바싹 붙어 줄지어 서있으면서,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매 순간 마시고 있으면서,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소음들을 매 순간 듣고 있으면서 저렇게도 귀여운 연두를 피워낼 수 있을까 놀라웠다.


몸의 모든 생기와 활력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나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실려가면서 계속 나무들의 연둣빛 이파리들을 바라보았다. 그 돋아나려고 하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피어나려고 하는 이파리들의 힘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편의, '나 아직 살아있어'라는 말을 떠올렸다. 남편이 지금 연두로 살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색깔로 따지면 진초록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어쨌든 남편은 살아있다. 아직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말이다.


남편은 토요일인 오늘도 출근을 한다고 했다. 너무 많이 움직여서 무릎보호대가 자꾸 무릎 아래도 흘러내려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저번주 2주 만에 집에 내려왔을 때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무릎이 아프다고 다리를 절뚝거리던데, 무릎보호대를 흘러내리지 않는 튼튼한 걸로 다시 하나 사줘야 하나 싶다가 그렇게 당하고도 남편 걱정을 하는 내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남편이 차를 가져가는 바람에 주말에 어디 움직일 수가 없어 아주 불편하다. 남편 사업이 안 좋아져 그 돈을 메우느라고 있던 차를 다 팔아치우고 내 이름으로 다시 산 차였다. 남편이 이름만 내 걸로 하면 바로 돈을 준다고 약속했었지만 당연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년째 말이다. 이것 말고도 남편이 쳐놓은 사고는 수두룩한데, 나는 그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허망할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남편이 단지 아직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겐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남편은 자주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언제나처럼,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한다. 그 '조금'은 얼만큼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한다. 남편과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좋은 날은 오지 않았다. 남편이 '조금'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에게도 다시, 파릇파릇 생명력 넘치는 연두 같은 날들이 올까? 남편의 '조금만 기다리면'은 언젠가 한 번은, 딱 한 번은 이루어질 수 있는 약속인 걸까?


연두로 피어난 이파리는 여름철 초록으로 무성해지다가 가을이 되면 갈색으로 말라 떨어진다. 그러니 우리에게 파릇파릇 연두의 시절은 다시 오지 못한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린다. 어쩌면,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쩌면 일생에 딱 한 번쯤은 말이다.


나희덕 시인의 '연두에 울다'라는 시가 오늘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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