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그 달콤함에 기대어

행복에 대하여

by 휴지기

네가 가장 많이 하는 말 두 개를 고르라면 '귀찮아'와 '집에 가고 싶어'일 것 같아. 이상하게 너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 너에게 '집에 가고 싶다'는 의미는, '집에서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인 것 같아.


네가 '역시 집이 최고야'라고 말하는 순간에 너는 주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수박을 먹으며 유튜브를 보거나 소파에 역시 비스듬히 앉아 수박을 먹으며 책을 읽고 있어. 그러니까 최근 너의 최고의 순간에는 언제나 '수박'이 있는 거지.


나는 너에게 최고의 순간을 주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수박을 사들고 오고 있어. 오늘처럼 34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에, 그냥 걷는 것도 힘든 날씨에, 한 통에 7kg 또는 8kg 하는 수박을 사들고 오는 길이 쉽지가 않아.


무거운 수박을 오른손으로 들었다가 왼손으로 들었다가, 품 안에 안았다가 다시 오른손으로 들었다가.... 시장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그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지고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지지.


가끔은 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올해에 더 이상의 수박은 없다, 생각하다가도 네가 또 그 수박을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베어무는 걸 보면 다시 또 그 고행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인터넷으로 시킬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시장에서 파는 수박이 좀 더 달고 가격도 저렴에서 그러기 쉽지 않더라구. 카트를 끌고 가서 사 올까 싶기고 하다가도 이상하게 엄마는 카트를 끌고 시장에 가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결국 사서 고생을 하는 거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수박 때문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 한강 작가가 오래전에 쓴 수필에 이런 내용이 있대.


다른 건 몰라도 여름에 수박이 달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붉은 수박의 맛을 생각하며, 웃음 끝에 나는 말을 잃고 있었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베어물 때, 내가 아무런 불순물 없이 그 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은.


그러니까 너도 그 맛, 아무런 불순물 없는 수박의 단맛을 느끼고 그 순간 행복을 느끼는 걸 텐데, 너에게 이렇게 선명한 행복을 주는 순간을 나는 지속시켜주고 싶어서 계속 수박을 사는 것인 것 같아.


네가 앞으로 살면서 선명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인지 가늠하지 못할 아픔과 상처들을 겪을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 그런데 그런 순간들에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야. 어떤 아픔들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도,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일 테니까. 그건 살아있는 누구나가 감내해야 하는 일일 거야.


그래서 엄마가 수박을 사 오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 엄마가 너의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너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물해 줄 수는 있으니까. 수박. 단지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 한 통으로 말이야.


네가 나중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을 때, 세상에 오직 너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이 순간이 희미하게라도 떠올랐으면 좋겠어. 비스듬히 앉아 수박을 먹으며 '아, 역시 집에서 수박 먹는 게 최고야'라고 말하던 순간을. 네가 행복했다고 느꼈던 장면들을 말이야. 그러면, 그 아픔과 외로움을 견뎌낼 힘이 생길 거야.


지금 냉장고에 오늘 하루 먹을 수박밖에 없어서 오늘 또 수박을 사러 엄마는 시장에 가야 할 것 같아.


커다란 수박을 하나 사들고 들어올 테니 너도 수박을 한 입 베어 물고 커다랗게 웃어주길. 엄마가 사들고 온 수박으로 너의 행복한 장면을 하나 더 만들어 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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