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하는 가난

안온, 「일인칭 가난」을 읽고

by 마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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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얽힌 이야기는 바닥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두껍고 촘촘하게 축적되어 있다. 빛바랜 기억을 뒤적여 본다. 지자체와 연계된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 무료 식권을 내밀 때면 단번에 얼굴을 갈아 끼우던 식당 주인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작은 종이조각을 낚아채듯 받던 얼굴들은 희미하지만 그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만큼은 또렷하다.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래 살았던 주택은 쓰레기장과도 같았던 공터 바로 옆에 위치해서 온갖 종류의 벌레가 들끓었다. 머리를 감던 엄마는 성인 남성 손가락만 한 지네가 화장실 바닥을 기어가는 것을 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동여매고는 꿈틀거리는 그 생물을 조용히 밟아 죽였다. 에어컨은 없고, 얼기설기 지어진 집은 태양의 열기가 그대로 투과되는 탓에 여름이면 냉수를 온몸에 끼얹어 체온을 낮추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그러고도 잠에서 깨어 엄마와 옥상에 올라가 서늘한 밤공기에 몸을 버무리곤 했다. 옥상에서 고개를 꺾어 우두커니 바라보았던 밤하늘은 유독 검었다. 겨울에는 비싼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후 하면 입김이 나오는 방안에서 오빠가 군대에서 가져온 깔깔이나 싸구려 패딩을 입어야만 했다. 언 손과 발을 데우려고 열선풍기를 몸에 바짝 붙였다가 태워 먹은 패딩은 버리지도 못하고, 그을린 자국이 남은 채로 식구들이 돌려가며 입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담임선생님께 가장 먼저 부탁하는 일은 장학금 추천서를 작성해달라는 것이었다. 추천서를 받아든 선생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가벼운 연민이 스쳐지나갔다. 연민을 숨기려는 엉성한 노력은 엉성한 대로 투명해서 모르는 척 연기했다. 연기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능숙해졌다. 나열한 이야기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장면이 있다. 영영 흉터로 남게 될 장면들. 망각하고 있다가도 문득 기억이 떠오르면 윤곽이 뚜렷해지는 날들.


가난이 마음속 쌓아 올린 퇴적층에는 슬픔과 체념, 피로와 절망 같은 것들이 모래알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풍요를 전시하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서 가난의 얼굴은 생경하고 낯설다. 불쾌하고 불편하다. 더러운 것도, 불경한 것도 아닌데. 그러나 경쟁하듯 부를 과시하고, 과시한 부를 다른 사람의 것과 저울질하기에 바쁜 지금에도 가난은 실존한다. 돈이 없어서 제때 병원을 찾지 못하는 노인과, 주말과 아르바이트를 맞바꾸는 청년과, 수학여행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특히 장애나 여성, 결손가정이나 질병과 맞물리는 가난의 얼굴은 더 거칠고 혹독하다. 그런 경우에 가난은 존엄의 문제를 넘어서 생존의 문제로 귀결된다.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게 된다.


여기, 시각장애인이면서 알콜중독자인 아빠와, 그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가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엄마를 둔 97년생 안온이 있다. 20여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며 그가 경험한 가난을 거침없이 폭로한 글이 있다. 글에서 묘사한 가난의 형태는 내가 겪은 것과 어떤 면은 너무 닮아 있어서, 어떤 면은 극히 달라서 완벽한 이해와 불가해를 오가며 책을 완독했다.


내 가난은 뱀딸기 같다. 길모퉁이에서 발견해도 아무도 손을 뻗지 않는, 그런 주제에 빨갛고 통통해서 힐끔거리게 되는. 좀 따서 가져가실래요? 권할 수도 없어서 나와 엄마가 서로의 입에 넣어주었던 그런.

수급자 생활에서는 탈피했지만, 가난을 탈피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스무 살부터 시작한 학원강사일에 이력이 붙어 월 소득은 높아졌으나, 20년간 내 오장육부에 붙은 가난은 쉬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남들만큼만 돈을 벌면 씻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가난'을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심히 망설였지만, 그래도 썼다.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일인칭의 가난을 쓸 테니까. 세상에는 빈곤 계층 모델로는 잡히지 않는 일인칭의 쟁쟁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일인칭 가난, 프롤로그 발췌



책을 여는 것은 멸균우유에 대한 그의 옛 기억이다. 방학식이 있던 날, 반 친구들 앞에서 안온과 다른 한 친구는 학급 번호로 호명된다.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우유 배식 때문이었다. 17번과 28번 학생을 부르는 교사의 건조한 부름에는 아이들의 이름은 없고, 배려는 소거되어 있다. 아이들을 따로 불러 조용히 안내하는 것은 한 줌의 배려에 불과한데, 무심한 어른이 빚은 것은 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가난한 아이들은 교실에서, 주민센터에서, 놀이터에서, 혹은 그 어느 곳에서 누군가 무심코 뱉은 말에 쉽게 마음이 베인다.



떠올리면 서늘해지는 비슷한 장면이 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도시에서도 유난히 낙후된 동네에 위치해 대부분의 학생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이돌이 새로 발매한 앨범과 오늘의 급식 메뉴만이 중요했던 여자 중학생들에게는 어느 집 친구가 어려운지 관심도, 알 방도도 없었다. 하루는 담임이 덤덤한 어투로 반의 1/3 정도 되는 학생들을 지명하고는 방과 후 곧장 강당으로 가라고 말했다. 지목된 몇몇의 반 친구들과 강당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두루뭉술한 안내만 듣고 집결한 우리는 곧 강당에 불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동네 미용실 사장님들이 소득 분위가 낮은 학생들의 머리를 정돈해주기 위해서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선배들의, 후배들의, 그리고 친구들의 집안 형편이 한날한시에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좁고 웅웅거리는 강당에는 우리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배려는 누락되어 있었다. 누구를 위한 봉사인가,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마음 한 부분은 얼마간 훼손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두발규정에 맞게 머리를 다듬는 미용실 사장님들과 엉거주춤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 서걱서걱 흩어지는 가위 소리,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섞여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맡겼던 나. 15년이 지난 지금도 선득한 파편들이다.


노골적인 냉대와 마뜩잖은 동정의 눈빛은 한번 겪으면 잊기 힘들다. 나는 그 눈빛이 어리는 전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눈빛은 미간에서 시작했다. 억지로 웃는 입꼬리로는 숨길 수 없는 가난에 대한 혐오가 서린 미간. 눈이 먼 아빠를 부축해 행정복지센터에 가는 날마다 진지함을 가장한 그 미간을 보았다.

지금도 나는 재해 지역이나 쪽방촌에서 생수며 연탄, 반찬 등을 나르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 끔찍하다. 새것이어서 유난히 빨간 목장갑과 일부러 묻힌 듯 재가 거뭇거뭇한 기름진 얼굴들. 그들이 동정마저 전시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이 죽고 더 가난한 이들이 태어난다.

일인칭 가난, 18-19p 발췌


안온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무릎을 다쳤다. 나라에서 나오는 수급비는 생활비로 쓰고, 어머니는 잉여의 돈을 벌어 딸을 학원에 보냈다. 상한 무릎에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육비를 대는 엄마의 고단함을 씻어내려면, 동시에 허구한 날 술을 찾는 아빠의 입원비를 대려면 그는 3인분의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려면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해 노동의 단가를 올려야 했으므로 온은 공부에 매진했다. 고학력을 소유하는 것은 가난을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신화를 그러안고 책상에 앉아 교과서와 EBS교재를 정독하는 안온을 그려본다. 그도 시험을 망쳐서 혹은 문제가 풀리질 않아 무너지는 날들이 많았을까. 비싼 인강비와 교재비 때문에 깜빡이는 결제창 앞에서 주저하기도 했을까.


교복을 입은 온은 자연스레 고등학생인 나로 전환된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최저시급에 미치는 월급으로 삼남매를 건사하느라 점차 푸석해지는 엄마에게 쾌적하고 아늑한 삶을 주려면. 눈에 띄게 좋은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반면 성실함은 돈 드는 것이 아니어서 의자에 달라붙어 수학과 영어와 국어 문제를 게걸스레 풀곤 했다. 순공시간을 5분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소등된 기숙사 방을 나와 빛이 있는 곳을 찾다가 화장실 변기 위에서 책을 보기도 했다. 모의고사가 끝난 날, 친구들이 야자를 째고 삼삼오오 놀러나가는 중에도 꼿꼿하게 앉아 시험 결과를 분석하고, 밀린 인강을 들었다. 묵직한 졸음을 씻어내며 꾸역꾸역 강사의 해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일상이 긴장으로 점철되었던 이유에서였을까, 고등학교 3학년에는 내내 불면증을 앓았다. 충혈된 눈을 하고도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밤이 늘면서 피로는 날마다 누적되었다. 육체의 피로는 황폐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혹독한 철을 지나며 시험에 대한 강박이 깊게 뿌리를 내렸는지, 여전히 어떤 종류든 시험을 앞두었을 때 불안을 느낀다. 잊을 만하면 시험을 망치는 악몽을 꾼다. 갇혀있는 불안을 얼마나 더 걷어내야 악몽은 끝이 날까.


책을 사거나 학원에 다니면 '진짜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이 힘에 부치는 가난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삯과 몸과 시간을 먹어 치우며 학원을 다닌 2000년대에도 여전히 가난의 탈출구가 '교육'이었다는 점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게 공부는 가성비 좋은 행위였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 동안은 가난한 나와 가난하지 않은 남들 사이에 놓였던 벽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받는 이런저런 국가 지원의 명목이 '우수한 학업 성적'인 것이 만족스러웠다. 가구소득이 대한민국 평균에 한참을 못 미치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 부모의 자녀여서가 아니라, 장차 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재목이자 사회에 득이 될 인재여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훌륭하지도 득이 되지도 않지만, 그렇게 될 예정이니까 그 값을 당겨서 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사라져가는 개천 용 신화의 마지막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항상 나일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용이 된다면 내 가난도 신화가 될 것이었다.

일인칭 가난, 30-32p 발췌


문학 교과서에 자주 삽입되는 백석 시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는 안온의 기도문이다. 열아홉의 온은 단출한 방 안에서 가난을 켜켜이 원망하던 중이었다. 방밖에는 어김없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아빠가 있고, 그의 딸은 벽을 바라보며 생의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유 없는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연처럼 툭 떨어진 시집에서 어느 구절을 읽게 된다. 시가 인쇄된 종잇장을 매만지며 가난에 대한 시인의 문장을 기도처럼 되뇌는 온을 상상해본다. 흰 바람벽 앞에 망연히 서서 가난에 꼭꼭 숨긴 신의 뜻을 가늠해보는 백석을 상상해 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정말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지음 받은 것일까.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든 것이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1941) 中


밟아온 삶을 돌아보면 가난 때문에 돋아난 슬픔과, 가난해서 닿게 되었던 사랑이 있다. 남들은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집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착잡한 얼굴이 되어 원망을 삼키곤 했다. 그러나 속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우리 식구에게 값없이 흘려보낸 사랑을 가닥가닥 펼쳐보면 원망하는 마음은 힘없이 추락한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 딸 등록금에 보태라며 돈을 부쳐준 사람들이 있다. 엄두가 안 나는 서울의 월세에 전전긍긍할 때 가까운 엄마의 지인은 LH에서 제공하는 전세대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덕에 나는 작지만 채광이 좋은 원룸을 얻어 월세 걱정 없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4학년 1학기에는 졸업생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기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교환 프로그램을 다녀왔다. 그렇게 유럽에서 거주하게 된 5개월간 어떠한 궁핍도 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새 풍경과 새 마음을 담았다. 1박에 3만원 하는12인실 게스트하우스에 묵어도, 교통비를 아끼려 몸통만 한 배낭을 메고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를 걸어 다녀도 마냥 충만했다. 지금도 입안이 텁텁할 때면 아껴가며 꺼내어 보는 삶의 단락이다. 선배들의 후원이 아니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그리움이다. 백석의 말처럼 가난 속에서 슬픔과 사랑은 공존한다. 빚진 마음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의 일부를 떼어 해외와 국내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 갚지 못할 사랑이 층층이 쌓여있다.


재단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른이라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미국 서부여행 계획서를 내밀었다. 담임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 능력으로 미국 여행을 가는 애라면서 교무실 청소를 하러 간 나를 치켜세웠다.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셜 스튜디오, 그랜드캐니언과 라스베이거스, 금문교에서 나는 여행을 맛봤다. 금문교 근처에 클램차우더 수프를 빠네에 담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방심하면 사람 종아리보다 큰 갈매기가 빵을 채갔다. 한 끼 식사를 새에게 도둑맞는 해프닝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는 것을 남들은 벌써 알았던 걸까. 다들 이런 해프닝에 진심을 다해 속상해하고 또 행복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멘토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디즈니 후드 티를 선물해주자, 몇몇 아이가 울먹였다. 선생님께 뭔가 보답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이들은 일주일 전보다 강인해진 입매로 한마디씩 했다. 꼭 가족과 다시 오겠다, 나중에 나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 선생님이, 의사가, 작가가 되겠다. 그들은 그때의 다부진 약속들을 지켜냈을까.

일인칭 가난, 77-78p 일부 발췌


안온과 열음은 자매 같은 사이다. 이들은 같은 주공아파트 단지에서 10대를 보냈다. 대구에 있는 대학으로 도망치듯 탈출해 안온이 없는 안온의 방에서 그의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흔적을 치운 것도 열음이다. 딸에게 주먹질을 일삼는 열음의 아빠와 소주병을 던져대는 안온의 아빠는 그들의 자매애를 더욱 질긴 것으로 만들었다. 여간해선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그들은 가난의 부스러기 같은 울퉁불퉁한 마음을 공유한다. 그들의 대화에서 가난은 해학적인 것으로, 가벼운 것으로 변모한다. 이들의 우정은 가난을 이해하는 마음에서 뻗어나간다. 가난을 아는 사람만이 영영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서, 그래서 가능한 연대의 조각이다.


언젠가 열음이 말했다. 언니, 우리를 아는 건 우리뿐이야. 마치 전쟁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난을 수군거리며 서로를 껴안는다.

일인칭 가난, 87p 발췌


안온의 가난에서 8할을 차지하는 것은 가족과 얽힌 비극이다. 진하고 검은 비극에 가깝다. 온이 대학에 붙어 집을 나온 지 2년째 되었을 때 그의 아빠는 우울증약과 불면증약을 닥치는 대로 털어넣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돈을 꾸어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행패를 부려 습관처럼 경찰서에 불려가던, 사고로 시력을 잃은 후에는 온통 절망에 절여진 그가 식구들에게 남긴 것은 4,800만원의 빚이었다. 빚의 상속을 막기 위해 온은 장례를 치른 후에도 법원과 구청과 법률사무소를 드나들며 혹독한 날들을 살았다. 지난한 법적 절차를 밟아나가는 동시에 계절학기 수강과 학원 일을 병행하던 당시의 온은 고작 스물하나였다.


가족과 가난과 불행을 나란히 붙여본다. 붙여보면 이런 문장이다. '가난'한 '가족'은 대개는 '불행'하다. 정상가족이 빚어내는 정상적인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은 가족여행을 가고, 주말 한 끼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잔뜩 부풀어있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깜짝 선물을 해주는 것은 평범한 가족에게는 자연스러운 것들이지만 하나같이 돈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그래도 우리 가족은 화목하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가난이 드리운 그늘을 애써 지웠던 것 같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면서 유일한 위안마저 부서졌다. 밤마다 아빠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열거하는 엄마 얘기를 괴로운 마음으로 받아냈다. 그러면 당장 내일이라도 사라져 없어질 것 같은 엄마의 우울이 해소될 거라고 믿었다. 돈 문제로 엄마, 아빠가 언성을 높일 때면 떨리는 몸으로 어린 동생을 도닥였다. 앳된 얼굴을 한 동생이 상처받을까봐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새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에는 우울과 슬픔이 넘실댔다. 해사하게 웃으며 크면 아빠와 결혼할거라고 말하던 어린 나는 온데간데없고, 툭 하면 화를 내는 아빠 앞에서 입을, 마음을 꾹 다물게 되었다.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비켜갈 수 있었을 불행이었을까,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덜 미워했을까, 나는 그들을 더 헤아리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무용한 물음들인 것을 안다. 엄마가, 아빠가 못난 것이 아니라 실은 가난에 모든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인 것을 안다. 다만 꼬박 10년간 가족을 휩쓸고 간 불행을, 오랜 시간 나를 괴롭게 했던 불화를 세부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실은 훨씬 긴 이야기다. 내 가난의 8할을 차지하지만 9할까지는 아닌 이야기. 쉬쉬하지만 알고 보면 소문 난 이야기. 남과 견주어 특별할 것도 비밀일 것도 없는 이야기. 털어놓고 보면 평범한 이야기. 털어놓기까지 꽤 걸린 이야기. 그러니까, 가족 이야기다.

장례라는 것은 식을 치르지 않으면 정말 짧고 간단했다. 할머니의 무덤 옆이 아빠의 묫자리였다. 아빠를 묻고 나니, 날 괴롭히던 아빠가 이제 편안했으면 좋겠는 아빠, 그간 질리도록 괴롭혔으니 하늘에서는 부디 나와 엄마를 굽어 살펴주면 좋겠는 아빠가 되었다.

한 달 반을 매달린 끝에 법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정승인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문득 귀가 엄청 시렸다. 아, 쌍꺼풀만이 아니었네. 귀도 아빠를 닮았지. 코도 아니고 정수리도 아니고 하필 귀가 시려서 짜증이 났다. 왜, 나는, 아빠가 이런 식으로 죽어서. 왜, 하필 이 겨울에 아빠가 죽어서. 어째서 나는 혼자 이렇게. 뼈가 삭을 것처럼 아팠다.

일인칭 가난, 99-110p 발췌


지금 안온은 꽤 잘 버는 축에 속하는 n년차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더 이상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되지 않고, 마음을 먹어야만 하지만 엄마와 3만 5천원짜리 스시 오마카세를 먹기도 한다. '단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반려묘를 살뜰히 키우며, 빽빽한 학원 수업 스케줄을 소화하고, 틈틈이 글을 쓴다. 주공아파트에서 살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생활이다. 날마다, 조금씩 더 매끄러운 삶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가난과 무관하게 된 것일까. 그의 삶은 가난과 분절된 것일까. 현재의 가난에 대해 안온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한번 맛보면 가난의 맛은 잊히지 않는다. 그 정도 수입이면 넉넉한 편이라고 주위에서 날 추어올려도 내 기분은 전혀 넉넉하지가 않다. "가난은 헤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 인력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헤어날 길 없이 우리를 집어삼킨다."

일인칭 가난, 137p 발췌


3년 전,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이번에 차상위계층 심사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덤덤한 목소리였다. 벽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스티커처럼 10년이 넘도록 우리 가족에게 들러붙어 있던 공적인 표식 같은 것이 끝내 떼어진 것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러면 동생 국가장학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였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그럼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건가'였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이날을 떠올려볼 때면 후련할 줄로만 알았는데,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우리집의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 지금 엄마, 아빠가 살고 있는 집은 한때 허름한 식당이었던 곳을 개조한 단층주택이다. 그곳은 한겨울이면 수도관이 얼어 끓인 물로 세수를 해야 하고,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방마다 둔 라디에이터와 전기매트에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하는 곳이다. 엄마는 몇 년째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치매 어르신의 집들을 차례로 방문한다. 낡은 경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리며 이집과 저집을 옮겨다닌다. 우두커니 방에 누워있는 노인들을 일으켜 꼼꼼히 몸을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입히며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번 돈은 노후를 위해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아마 십수년간 자격을 유지했던 심사에서 탈락한 것은 오빠와 내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남매는 각자 탄탄한 회사에 취업해 살림을 보태고 있다. 우리가 취업시장에 뛰어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높은 연봉과 직업적 안정성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1년이 넘도록 필기시험에 매진한 것도 두 조건을 충족하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4평 남짓한 원룸에서 8평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고, 1년에 한 번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간다. 여름 휴가철이 되면 부모님을 위해 회사와 연계된 휴양시설을 예약한다. 늘 남이 입던 옷을 입고, 남이 들던 가방을 들던 엄마에게 새 옷과 새 가방을 선물한다. 동생에게 이따금 용돈을 주고, 갖고 싶어 했던 것들을 눈여겨보다가 생일을 빌미로 챙겨준다. 나를 위해서는 여행을 자주 간다. 한푼두푼 열심히 아껴서 모은 돈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에 올라탄 나는 느슨한 마음과 빼곡한 일정표를 쥐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한결 윤택해진 삶을 쓸어내려본다. 가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안온의 말처럼 한번 맛본 가난의 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말하자면 피부에 깊이 패인 주름과도 같다. 아무리 펴고, 팽팽하게 잡아당겨도 놓는 순간 원복하는 주름처럼 가난이 새긴 무늬는 말끔히 지울 수 없고, 습관처럼 궁핍을 걱정하고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린다. 가난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한다. 번듯한 집을 사면, 좋은 차를 사면 가난에서 말끔히 분리되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부유한가, 가난한가. 이도 저도 아닌가.


가난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내려앉은 딱지들을 남김없이 긁어내고 싶다가도, 그 시절에 형성된 어떤 습관과 생활양식은 언제까지나 나의 일부를 구성할 것임을 안다. 이제는 희석되고 뭉툭해진 기억들을 매순간 해체하고,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가난을 해석하는 일을 이어나갈 것이다. 숙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느릿느릿 나아가는 것이 움켜쥔 숙명인 것은 아닐까 중얼거린다. 긴 시간 건너온 가난에 이해의 조각을 덧대어가며 가여움과 부끄러움은 깊숙이 봉합하고, 그 속에서 기특하게도 피어난 사랑과 기쁨을 응시하고 싶다. 밀폐되어 있는 더 많은 가난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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