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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pr 29. 2023

나 홀로 산행의 즐거움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평소 운동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매주 일요일마다의 산행은 웬만해서는 거르지 않는다. 어느덧 이십 년의 생활습관이 되었으니 두루두루 전국의 명산을 섭렵한 티를 낼 법도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타고난 성품이 워낙 주변머리가 없던 탓에 기껏 근교의 산들만 다람쥐쳇바퀴 돌 듯할 뿐이다. 차량으로 한 시간이면 당도하는 승학산, 금정산, 신어산, 불모산, 가덕도 연대봉 정도인데 이래 봬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샛길 코스도 여럿 알고 있는 자칭 근교산 마니아다.


근교산만 다닌다고 하여 근성근성 산행할 것 같지만 나름 꽤 까탈스러운 산행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원칙이다. 그런데 주차장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산을 한 바퀴 둘러서 와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산행코스로는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독서와 메모도 하면서 쉬엄쉬엄 마음 내키는 대로 최대한 자유롭게 산행한다는 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멋모르고 산악회를 따라나선 딱 한 번의 일탈을 제외하고는 와이프와 함께하거나 나 홀로의 산행을 즐기는 편이다. 물론 가끔씩 친구부부와 동행할 때도 있지만.


최근에 승학산에서 여섯 시간짜리 명품코스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며 은근히 논쟁을 유도하는 악취미도 있다. 크지 않은 산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그런 코스가 있을 리 만무하다며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작은 산일 지라도 집중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다 보면 용케도 나만의 명품코스를 만들어내곤 하는데 뭐 나름으로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오늘은 시계방향의 순번에 의해서 불모산이다. 그중에서도 눈과 귀의 즐거움을 한시도 내버려 두지 않는 장유계곡 코스로 오를 참이다. 며칠 전 적당히 비도 내렸겠다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제법 경쾌하게 들릴 만큼 계곡의 수량도 알맞다. 역시 산은 위대하면서도 넉넉한 품을 지녔다. 산의 품속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라앉았던 기분을 한꺼번에 물리칠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했다. 답답하던 일상에서의 스트레스가 일거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어느새 무표정하던 인상도 펴지면서 생기발랄한 봄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길도 비켜주면서 마치 녹아들듯이 서서히 산과 하나되어갔다. 그렇다고 온전하게 산과 하나되는 무상무념의 경지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번뇌로 가득한 중생은 저 홀로의 산행 중에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천 년 가락고찰 장유사를 경유하게 되었다. 마당의 한편에 금색으로 치장한 압도적 크기의 지장보살 대불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기에 무심결에 다가갔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가 목석같은 무신론자일지라도 합장과 함께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벗의 집을 방문하였으니 먼저 벗이 모시는 어른께 문안인사를 드립니다인간극장에서 방영되었던 내레이션이 귓전을 맴돌았던 탓이다. 비구니와 수녀는 이십 년 지기의 오래된 벗이었다. 비구니가 성당을 방문하여 가장 먼저 한 행동이 십자가상으로 다가가 합장을 한 채 머리 숙여 인사 올리는 것이었고 이때의 내레이션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이던가. 타인의 신념을 나의 신념과 동일하게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지극한 인간성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누리는 자유로움이리라.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여러 문화강좌 중 하나를 선택하였을 뿐 궁극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는 넉넉한 표현을 되새겨보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강화되는 나의 신념조차도 이웃한 하나의 문화강좌로 인정을 받는 듯하여 잔잔한 감동을 불러왔다. 사실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런저런 문화강좌를 기웃거려 본 적이 있었다.


천국을 설명하는 문화강좌를 수강했을 때 처음 얼마간은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천국에서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파고들자 문제가 발생했다. 맛있는 쵸코렛도 하루 이틀이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영원히 그렇게 따분하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영겁의 시간 속에 내포된 그 무료함을 견딜 수가 없어 중간에 수강을 포기하고 말았다. 윤회를 설명하는 또 다른 문화강좌도 수강해 봤지만 어차피 전생을 기억하지 못할진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육신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단순 명쾌하면서도 합리적인 문화강좌를 알게 되었다. 육신을 벗어난 영혼을 부정하는 현대과학에 대한 강좌였다.  그 논리의 깔끔함이 나의 성정性情에도 꼭 들어맞아 그날 부로 착실한 수강생이 되었다.


종교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 간에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진정한 벗이 될 수 있었다. 4대 종교의 성직자들이 화엄사에서 평화음악회를 개최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듯이 말이다.


벗의 집을 방문하였으니 먼저 벗이 모시는 어른께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지 않은가. 네 시간의 산행을 마칠 때까지 내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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