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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pr 22. 2023

나를 안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 나의 지난 인생을 학점으로 정산한다면 과연 몇 학점이나 줄 수 있을까? 결혼정보회사에서는 최대 15구간으로 구분하여 등급을 매긴 다지만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인생의 점수가 자못 궁금해졌다.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인생을 십 점 만점의 십 점이라고 생기발랄하게 말하던 천문학자 심채경의 당당함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소개한 배구선수 김연경의 높은 자존감 앞에서는 솔직히 나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로 작아졌다.

“나에 대한 남들의 말보다는 나 자신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려고 합니다. 제 생각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는 높디높은 두 사람의 자존감을 우러러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이 몰려왔고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결코 거만하지 않으면서도 매력 넘치는 표정으로 발산되는 두 여인의 높은 자존감의 바탕에는 자기애自己愛로 꽉 차 있었다. 사랑!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이토록 상식적인 단어일지라도 나에겐 지극히 어색한 단어로 다가온다.


암만 생각해 봐도 내가 줄 수 있는 내 인생의 평균학점은 B학점 정도? 다소 후하게 준다고 하더라도 B+ 이상은 곤란하겠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B+이라는 맹숭맹숭한 학점이 아니다. 심채경과 김연경은 방송에 나와서도 큰소리로 외칠 수 있다지만 난 농담으로라도 내 인생의 점수를 십 점 만점의 십 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땐 혼잣말로라도 외칠성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둘!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대체 얼마나 알고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을 말할 진데 이 세상을 통틀어서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러한가? 흐릿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아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대여섯 살 때로 거슬러간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서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마주하려는 순간 웬일인지 눈자위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한 어린아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게 주어진 인생의 70%를 소진하고서야 초체한 모습의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육십 평생을 늘 이런 모습의 아이와 함께 살아왔다면 대체 나는 누구의 삶을 살아왔단 말인가? 타인을 바라보듯 황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빤히 주시하는 어린아이와 나, 지나온 시간들이 얼마나 엉터리였으면 마치 우린 서로 다른 이를 쳐다보듯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린아이의 표정이 여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도록 나 자신을 사랑하기는 한 것인가? 유기 즉 부양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이혼의 6대 사유중 두 번째 항에 해당할 만큼 심각한 문제다. 나 자신을 유기한채로 살아온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한동안 머릿속은 먹먹한 상태로 먹통이 돼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고 살짝 뜨거워진 눈자위에서는 이슬방울까지 맺혔다.

 

잘 짜인듯한 프레임 속에 나를 가둔 채 뭔가에 쫓기듯이 허급지급 달려온 인생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식의 무미건조한 인생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때로는 거칠게 학대하면서 살아온 삶 속에서는 애당초 자존감 따위가 자리할 공간은 없었다. 매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비굴한 타협을 미덕으로 포장하면서 살아온 삶이었다. 나의 삶일지라도 다른 이의 삶인 듯 그렇게 방관자처럼 스스로를 외면하면서 살아온 삶 속에서는 어차피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이것을 인식하고서야 나로부터 유기되었던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초체한 모습의 저 아이를 온전한 나로 성장시켜야 할 텐데 너무 늦은 것일까? 아이의 어두운 표정이 임계점에 다다른 듯 몹시도 위태위태하다.


빅뱅 이후 우주는 138억 년이라는 영겁의 시간을 지나왔고 또 앞으로도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갈 테지만 이 두 영겁의 시간을 합치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찰나에 불과하다. 그나마 삼세번도 아니고 매정하게도 딱 한 번만 주어진 인생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은 180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나마 앞으로 살아갈 잔여시간이 30%뿐이라면 어떻게 허투루 낭비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초췌한 형색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어린아이에게로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여리디 여린 아이의 가슴팍을 힘껏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더 이상은 외면하지 않으리라! 늘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정답게 대화하며 살아가리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존중하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면서, 친구처럼, 선생님처럼, 연인처럼, 그렇게 토닥토닥 위로하면서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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