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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30. 2023

어렵게 성사된 교육감 면담

시골초등학교 이야기 

드디어 오늘은 교육감 면담이 예정된 날이다. 면담시간은 오후 한 시 반으로 잡혀 있었지만 다소 여유롭게 출발하기로 했다.

추진위를 대표하여 공 회장과 내가, 동문회를 대표하여 박 회장이, 학교운영위원회를 대표하여 곽 위원장이, 이렇게 우리 네 명은 먼저 교장실을 방문했다.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며 이 교장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 네 분의 어깨에 우리 학교의 앞날을 위한 실로 무거운 짐이 실려 있습니다.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저는 오늘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박 회장이 화답했다.

“오늘 한번 만나보고 그래도 영 성의 없이 나온다 싶으면 앞으로는 말로 하는 거는 그만할랍니다.

백날 만나보면 뭐 합니까! 아무 진척이 없는데! 

우리 동문들 한 삼백 명이 떼로 몰려가서 고함을 질러대정신들을 차리지, 안 그렇습니까! 교장선생님?”

거구의 박 회장이 씩씩거리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일행들은 워낙 익숙한 상황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 교장은 달래주는 시늉을 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우리 회장님께서 앞장을 서신다면 삼백 명이 아니라 오늘 가시는 인원만 해도 충분합니다, 

회장님이 교육청 앞마당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면 본청 직원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을 겁니다.

장비장군이 쳐들어 왔다고 하면서요!

이 교장의 우스갯소리에 좌중은 한바탕의 폭소가 터졌다.

이 교장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바야흐로 지금 시대가 21세기입니다. 고함지르고 부수고 하던 전근대적인 방식이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제가 아는 부산 교육계는 오늘날 우리 배영이 직면한 이러한 비교육적인 사태를 극복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동문님들이 교육감을 찾아뵙고 진심 어린 청원을 하신다면 교육감께서도 좋은 답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희망찬 결과를 기다리며 저는 오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겠습니다!”

이 교장이 큰일 나가는 장부들은 든든하게 밥을 먹고 가야 한다며 굳이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모두는 보양식인 장어탕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이윽고 이 교장의 따듯한 배웅을 받으며 우린 위풍도 당당하게 교육청을 향해서 출발했다.


다행히 오늘따라 상습적인 교통체증 구간조차도 시원하게 뚫려있어 생각보다도 일찍 교육청 앞마당에 도착했다.

예정된 면담시간까지는 다소의 여유가 있었다.

비서실장의 안내로 옆방 대기실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을 때 상대편의 장수들이 나타났다.

교육지원과의 박 과장과 수용 2팀의 김 사무관 그리고 북부교육청의 시설지원과장이었다.

모두들 한두 차례씩의 공개 스파링을 통해서 가볍게 을 풀어본 경험들이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 앉았다.

교육감 면담까지는 앞으로 십오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쟁점 사항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먼저 탐색전을 시작했다.

“북부청에서 오신 시설과장님! 북부청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해 봅시다.

본청에서 2012년에 밀어붙이려고 하는 배영에 대한 적정규모 학교 육성 계획을 아예 철회를 주든가? 

아니면 최소한 5년 이후로 완화해주지 않는 이상 학교 부지 안에서의 체육관 건립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 맞으시죠?”

북부청의 시설과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 빠른 김 사무관이 나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내 말을 제지하려 나섰다.

하지만 난 김 사무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 애당초 그의 말을 무시하고 이번에는 본청의 박 과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본청에서는 지역청인 북부교육청에서 알아서 판단할 일이기 때문에 본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 맞으시죠!”

본청의 박 과장 역시 아무 말 없이 미소로 화답했지만 김 사무관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정색을 하며 말한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유도질문하지 마세요!

체육관 문제는 북부청에서 알아서 판단할 사안이지 우리 본청이 개입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러시는 의도가 뭡니까?

바로 며칠 전에는 우리하고 네 시간 넘게 마라톤 회의까지 하면서 그쪽에서 제시하신 대안을 검토해 보자고 합의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서 뒤통수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교육감님 면담을 신청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리고 정치인은 왜 또 내세우는 겁니까?

황 위원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파김치가 되도록 네 시간 동안이나 우리를 괴롭혔는데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김 사무관의 신경질적인 말 폭탄이 난무하자 오늘 회합의 선봉장 격인 동문회장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표정이다.

잔뜩 화난 장비처럼 눈알을 부라리고는 김 사무관을 쏘아붙였다.

“처음부터 우리가 정치인을 찾아갔어요? 당신들하고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니까 찾아간 것 아닙니까?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우리는 말을 장난 비스무리하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못 보는 성질이니까 말을 좀 가려서 합시다!”

그렇잖아도 험상궂은 동문회장이 정색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이자 김 사무관도 더 이상의 확전은 곤란하다고 판단했던지 한발 물러섰다.

이 기세를 활용하여 난 끊어졌던 다음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북부청에서 재량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본청에서 북부청의 족쇄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2012년에 예정된 ‘강서지역 적정규모 학교 육성 세부추진계획’에서 우리 배영을 아예 빼주던가,

아니면 적어도 5년쯤 후로 연기시켜 주셔야만 북부청에서 소신을 가지고 이 문제를 풀어갈 수가 있습니다.

2012년에 예정된 배영에 대한 통폐합 지침은 그대로 둔 채 북부청보고  당신들 소관이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만 북부청으로서는 알아서 할 수가 없는 거죠!”

김 사무관이 또다시 나서려 하자 이번엔 공 회장이 김 사무관을 노려보며 가만히 계시라고 일침을 놓았다.

덕분에 난 결론을 향해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본청에서는 북부청으로 미루고 있습니다만, 결국 사실상의 모든 키는 본청이 쥐고 있는 겁니다.

교육감이 허락하신 대로 배영에 체육관을 짓도록 부지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면,

본청에서는 배영에 대한 통폐합 계획을 2012년이 아니라 최소한 2015년 이후로 연기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부청에서 권한을 가지고 강서구청과 실무협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끼어들 수 있는 작은 틈새만 엿보던 김 사무관이 드디어 틈새를 찾았던지 기어코 끼어들었다.

“저희들과 약속하신 대안에 대해서는 강서구청과 협의를 해보셨습니까?”

사무관이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며 예리한 비수를 들이밀었다.

우리 추진위에서 체육관을 건축한 후에 특약등기 없이 교육청으로 기부 채납하는 그 대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청의 동의를 받지 못했음을 이 친구는 알고 있는 듯했다.

바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마침 비서실장이 들어와 교육감실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대기실에서 나와 교육감실로 들어서려는데 화사하게 웃으며 교육감이 문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자그마한 키의 단아한 몸매지만 눈빛만큼은 카리스마가 예사롭지 않은 당찬 표정이었다.

선거가 끝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습관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명함을 한 장씩 건네주면서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다.

공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일행을 교육감에게 소개했다.

본청의 박 과장도 김 사무관과 북부청의 시설과장을 교육감에게 인사시켰는데 취임한 지 몇 달이 되도록 아직까지 인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공 회장이 먼저 오늘 우리가 교육감을 만나러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육감님을 찾아뵙게 된 것은 우리 학교에 체육관을 지을 수 있도록 부지 제공을 허락해 주십사 한 번 더 청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들이 듣기로는 교육감님께서 결단을 해주셔서 우리 학교에 체육관을 지을 수 있도록 부지 제공을 허락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기 계시는 실무진들의 반대가 심해서 아무것도 안 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던 교육감이 옆 자리의 박 과장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떻게 된 건가요?”

잔뜩 굳은 표정의 박 과장이 준비한 자료를 교육감 앞에 내어 놓으며 브리핑을 시작하려고 했다.

“배영은 강서지역 소규모 학교에 대해서 추진하는 적정규모 학교육성 추진 대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체육관 건립에 필요한 부지제공을 했을 경우 향후 적정규모 학교 육성 추진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고, 이미 공문으로도 통보된 사항입니다”


박 과장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우리 측 중간 계투요원을 자임한 곽 위원장이 불쑥 나섰다.

“교육감님! 저는 학교운영위원장으로서 교육청의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12억이라는 예산은 교육청의 예산이 아닙니다!

우리 동문들이 모교 후배들을 위해서 체육관을 지어주려고 공항공사하고 힘들게 싸워서 따온 예산입니다.

그런데도 체육관을 못 짓게 하는 것은 교육청 본연의 임무인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멀쩡하게 잘되고 있는 우리 학교를 하루아침에 폐교시키겠다는 발상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입에 담기도 싫은 이런 험한 말을 교육 행정을 담당하시는 분들의 입에서 아무렇게나 나와도 되는 겁니까?

우리 학교는 교육청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더 잘할 수 있는 학교입니다. 많이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교육감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12억이라는 돈을 우리 동문들이 만들어왔으니 사슴 농장이나 하면서 놀리고 있는 학교 땅에다 체육관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위원장의  깔끔한 논리에 교육감도 수긍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득였다. 

부연설명이 필요했던지 공 회장이 다시 바통을 이어받았다.

“교육감님! 이번에 우리 학교가 부산교육청에서 선정하는 최우수 초등학교에 선정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우수학교 50위권 안에도 포함되어 교과부장관 표창도 받게 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부산교육청에서 선정한 최우수학교를 폐교하겠다는 것은 최우수학교 선정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폐교 정책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의 요구사항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우리 교육감님께서 바로잡아 주십사 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로까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감의 부드러운 표정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던지 표정에서는 진지함이 더해졌고, 진지함과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교차되고 있었다.

왼손으로 안경을 살짝 당기면서 조금 전 박 과장이 내어놓은 자료를 뒤지며 여전히 상냥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현재는 학생 수가 74명인데 내년부터가 문제네요,

내년에만 열 명이 줄어들고 그 후로도 계속 줄어드는 추세인데요?”

이제는 자기 차례가 되었다고 판단동문회장이 걸걸한 톤으로 교육감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표정만큼은 미소를 지어보려고 무진 쓰고 있었다.

“교육감님! 그 자료 순전히 엉터립니다! 내년 한 해 정도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내후년부터는 절대로 안 줄어듭니다!”

교육감이 다시 물었다.

“무슨 근거라도 있으신가요?”

교육감이 상냥하게 말하니 동문회장도 상냥하게 말하려고 억지로 애쓰는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근거가 있습니다! 강서는 천만 평 공영개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천지개벽이 일어날 정도로 크게 발전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시내와 가까운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강서 수용 계획에서는 완전히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마을의 고정 인구가 늘어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학생 수는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박 회장의 발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공 회장이 다시 부연설명을 자청했다.

“개발제한구역에서는 공영개발로 집이 철거될 경우에는 같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집을 옮겨서 지을 수 있는 이축권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대부분 위치가 좋고 토지수용계획이 없는 우리 마을로 이축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작년하고 금년에만 우리 마을에는 100개가 넘는 이축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문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는 대부분 공장으로 용도 변경이 되었지만 내년부터는 집으로만 이축을 해야지 용도 변경을 못하도록 법률이 개정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년부터는 한해에 최소 50채 이상의 집이 새롭게 생긴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2012학년도 입학생부터는 학생 수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박 회장이 다시 바통을 이어받았다.

“교육감님! 우리말이 틀리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그러면서 박 회장이 오른손 엄지 손가락으로 왼쪽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장을 지지는 흉내를 내니 교육감과 우리 일행은 한바탕 자지르지게 웃고 말았다.

지만 교육청 직원들은 하나도 우습지 않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들이다.


교육감이 자리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말했다.

“자 이 문제는 이렇게 정리합시다!”

이쯤에서 교육감이 결론을 내리려고 했을 때 모두는 침을 꼴깍 삼키며 교육감의 눈빛을 향해서 시선이 집중되었다.

“배영에 대한 적정규모 학교 세부 육성추진 계획은 향후 몇 년 동안은 보류하는 것으로 합시다!

앞으로의 학생 수 추이에 대한 경과를 지켜본 뒤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교육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 과장이 이번에도 미리 준비한 두꺼운 서류철을 뒤지더니 결재를 받은 듯한 서류를 펼쳐 놓으며 하소연하듯이 말한다.

이미 절차를 밟아서 진행 중인 사안이라 배영만 빼기가 곤란하다며 통사정조로 말하고 있었다. 

작은 몸매지만 교육감의 눈빛에서는 교육청 직원들을 압도할만한 충분한 양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내 말대로 하세요! 그리고 학교 부지에 체육관을 짓는 문제는 우리 북부교육장과 강서구청장이 서로 만나서 잘 협의해 보라고 하세요?

협의결과에 따라서 처리하도록 우리 교육청은 그 결정을 존중해 주도록 합시다!”

어느새 박 과장이 또다시 교육감 앞으로 서류철을 들이밀었다.

배영은 2012년에 시행하는 통폐합 대상 학교이기 때문에 부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며 절규하듯이 말했다. 보기에도 참으로 안쓰러울 정도다.


이때 교육감은 박 과장을 혼내듯이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서류철 집어넣으세요!

안되게만 생각하면 한없이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반대로 되게 생각하면 한없이 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박 과장! 내 지시대로 처리하세요?”

감히 어느 누가 로또교육감(기호 추첨 때 1번을 선택하여 당선된 것을 빗되어 하는 말)이라고 비웃었던가!

오늘 우리가 지켜본 교육감은 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철의 여인, 영국의 대처 수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박힌 돌처럼 한 조직에서만 오랫동안 근무한 행정공무원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선출직 수장이 그 자신의 정책을 펼쳐 나가기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이 새내기 교육감은 일반의 우려와는 달리 배짱과 강단이 대단해 보인다.

아랫사람을 압도하는 저 강렬한 카리스마가 살아있는 한 부산교육계의 앞날은 물론이고 우리 학교에도 희망이 솟꾸쳤다.

꺼져가던 우리 학교 실내체육관의 작은 불씨가 다시금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벅차도록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바뀌었다.

모교에 체육관을 지어주고 싶은 우리 동문들의 간절한 희망의 불씨가 거센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강력한 횃불로 승화되고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결론이 딱 부러지게 났으므로 더 이상은 교육청 실무진들의 안티성 발언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만 자리를 파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때마침 비서실장이 들어와 다음 일정지로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고 재촉하여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친절하게도 이번에도 출입문까지 배웅해 준 교육감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시라고 화사한 미소로 인사했다.


오래된 묵은 짐을 내려놓은 듯 참으로 오랜만에 후련한 마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오던 중이었다.

이때 교육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던 다혈질의 김 사무관이 고함치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교육감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면 안 되지요!”

앞서가던 곽 위원장이 김 사무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며 쏘아붙인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무엇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겁니까?”

이번에도 김 사무관은 대들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하셔야지 교육감님 앞에서 사실을 호도하시면 됩니까?”

잔뜩 화난 표정의 김 사무관을 박 과장이 제지하려고 했으나 한번 뚜껑이 열려버린 다혈질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한테 맺힌 게 많았던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에 학교에 갔을 때도 다른 분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라는 분이 직접 저한테 면박을 주면서 교육청하고 지역 분들 사이를 갈라놓지 않았습니까?

또 동문회 국장이라는 분은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습니까?

정말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들끼리 해결해도 될 일을 굳이 정치인까지 동원시켜서 사람을 피 말리게 하면서 괴롭히지를 않나, 도대체 왜들 이러시는 겁니까!

오늘도 그렇습니다, 교육감님 앞에서 정확하게 말씀을 하셔야지 사실을 호도하신 것 아닙니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런 식으로 말씀을 막 해도 되는 겁니까?”


저만치서 걸어가던 박 회장이 이번에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던지 몸을 홱 돌려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뻗어 김 사무관을 가리키며 반말조로 고함쳤다.

“이 사람이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나! 틀린 말이 뭐가 있었는데? 사실을 호도한 게 뭐냐 말이야!

당신 오늘 계속 시비조로 깐죽대는데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해! 진짜로 뚜껑 열리기 전에…”

장비장군의 거친 포효였지만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공 회장이 씩씩거리고 있던 김 사무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래듯이 말한다.

“아따, 좋은데 있을 때 좀 도와주소?

자주 만나니까 정도 드는데, 언제 자갈치시장에서 우리 곰장어로 소주 한 잔 합시다!

내가 대접할 테니까 시간 한번 내주소?”

이 상황에서 공 회장의 말이 재밌기도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김 사무관의 표정과 절묘하게 대비되면서 일행들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불시에 벌어져버린 범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던 본청의 박 과장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서서 김 사무관 쪽으로 다시 걸어와 잔뜩 뿔이 난 김 사무관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싸고는 힘을 주어 밀면서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해서 교육청 실무진들과는 기본적인 인사말도 없이 헤어졌다.

서둘러서 위층의 교육지원과로 올라가는 걸로 봐서는 자기들끼리 긴급회의라도 진행하려는 듯했다.

우린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행차라도 되는  장비장군을 앞장 세우고 후련한 기분으로 청사마당으로 내려왔다.

청사 마당에는 어느덧 노란 은행잎들이 미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개선장군을 위한 축하연이라도 열어주려는지 은행잎들이 화려한 군무를 추는듯했다.

어쨌든 오늘 이 시간부로 체육관 문제는 깔끔하게 종결된 것 같았다.

우와 한마디로 기분이 째지는 최고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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