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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도강 Aug 29. 2022

그놈의 인물이 문제였다

1. 겸업 농부의 좌충우돌기

김해공항 착륙을 앞둔 항공기가 을숙도 인근의 바다 위를 선회한 후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평야지대가 있는데 여의도 면적의 1.4배(116만 평)인 이 평야를 사람들은 보리 섬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초창기 이곳의 새싹보리를 떠 와서 한 겨울철에 유엔묘지를 조성했다는 정주영 회장의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겨울 풍경은 온 마을을 새파랗게 뒤덮은 새싹보리의 물결로 아련하지만 언제부턴가 비닐하우스의 물결에 밀려나버려 지금은 그 흔적마저 찾을 수 없다. 최근에는 우리 마을의 인접지에 명지 국제신도시다 에코델타시티다 연구개발특구다 하여 거대한 신도시들이 형성되고 있어 마치 천지가 개벽된 기분마저 든다.


지도를 펼쳐놓고 우리 마을을 바라보면 인물이 좋아도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장점이라기보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차라리 시장님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만 좋았으면 마을의 존속까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어차피 우리 주민들의 손을 떠난 문제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마을의 인물이 좋다는 말은 위치가 좋다는 말인데 부동산 중개업자의 마인드로 볼 때는 원도심지와의 접근성과 교통의 편리성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우리 마을은 태평양과 맞닿은 끝자락의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어 시내와도 가까운 편이고 남해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까지 사통팔달로 연결된 고속도로의 진출입로에 인접해있다. 거기다 자동차로 5분이면 경전철이, 10분이면 공항이, 15분이면 KTX를 탈 수 있으니 교통으로만 따지면 시내 중심지가 전혀 부럽지 않다.


매 달 계모임을 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보려고 애쓰지 않을 뿐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45년이 지났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졸업한 친구들을 한두 시간 안에 다 만날 수 있다. 이 모두가 교통의 편리성 때문인데 시골인 듯 시골 아닌 고향마을에서 여태까지 죽치며 살고 있는 이유다.

그냥 처음부터 농사를 짓던 뭘 하던 쭉 눌러앉은 친구들도 있었고 뒤늦게 고향의 가치를 깨닫고서 다시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다. 나가서 살아보니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도 흔치 않더라는 진리를 깨우쳤다고나 할까?  


지금도 마을 한 중간에 씩씩하게 버티고 서있는 초등학교는 해마다 마을 체육대회가 개최되는 복합 체육 문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어쨌든 반 시골도 시골 축에 끼인다고 초등학교가 유지될 정도의 학생수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는 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십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해마다 아이들을 공급하는 문제가 어려워지더니 최근 들어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을 자체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입학생이라야 고작 두세 명인 현실 속에서는 학교의 존립자체가 위태롭기만 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역교육청에서는 호시탐탐 폐교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지만 워낙이 지역사회와 동문회의 학교 사수 의지가 강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차일피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틈에 인접지의 극성 엄마들이 응원군으로 등장했다. 전국 최고의 어린이 밀집지역인 명지 국제신도시는 초과밀학급을 편성해야 할 정도로 아이들로 미어터진다.

교육청 예산으로 학교를 하나 신설하려면 기존의 과소학교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데 학생수가 적다고 수십 년간 존재하던 학교 없애기가 어디 만만한 일이던가?


극성 엄마들 사이에서도 보통의 극성 엄마들 말고 차원이 다른 진짜 극성 엄마들은 아이들의 교과 성적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엔 아이들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경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엄마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등하교 시간 학교 정문 앞을 지날 때면 잘 알 수 있다.

매일매일 자신들의 자가용으로 아이들의 통학을 감당해야 하는 극성 엄마들의 눈물겨운 교육열의 덕분에 겨우 폐교 위기는 넘기고 있다지만

     


지금부터 35년 전, 아름답던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대단지의 고철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일부 간 큰 농민들이 자신 소유의 농지를 매립하여 불법으로 고철상 임대를 주기 시작했다.

당시는 이에 분개한 열혈 청년들이 많았던 탓에 야음을 틈타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수십 장의 대자보들이 마을 곳곳에 도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열혈 청년들조차도 고철상 사업에 뛰어들고 말았다. 순전히 짭짤한 돈의 유혹 때문이었지만 그사이 생각의 마인드가 바뀌어버렸다.


죽기 살기로 고생하여 농사를 지어도 농작물의 시세는 들쭉날쭉!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농협의 빚만 늘어나는 현실은 우리 농민의 잘못이 아니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당시는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이후의 시기라 이러한 민중의 자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교육시키며 살아갈 수가 없으니 고철상이 됐던 뭐가 됐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농사가 정답이 아니라면 잘못된 국가의 정책을 순순히 따르지 말고 우리도 저항하자!. 마을이 발전하려면 뭐가 됐던 이것저것 많이 들어와서 북적거려야 된다는 말이 당시 무성하게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놈의 인물때문이었는데 마을의 위치가 좋아도 너무 좋았던 관계로 임대를 놓겠다는 땅만 있으면 들어오겠다는 고철상은 부지기수였다. 그 시절 엄청난 민원에 시달리던 도심지의 그 많던 고철상들이 우리 마을로 물밀듯 밀고 들어오면서 시내 중심지에서도 우리 마을 이름을 모르는 택시기사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고철상이 길을 터놓으니 그다음은 소규모의 공장들이 밀고 들어왔다. 이유는 딱하나! 교통의 편리성에 비해서 임대료가 저렴하다는 높은 가성비에 있었다.

버섯공장 콩나물 공장 오리축사 공장이 뭔 말인가 싶겠지만 농업 목적의 창고들이 얼랑 뚱땅 공장으로 변신하여 대규모의 사설 공단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심지어는 이웃의 합법적인 녹산공단보다도 오히려 임대료가 높은 실정이었다.


처음에는 고고한 학처럼 불법 대열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던 선비형 농민들도 차차 시간이 흐르자 자신들만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던지 불법 용도 변경자의 신분으로 변신해갔다. 농사보다는 몇 배 아니 몇십 배의 이익이 보장되었으니 어느 누구라서 동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불법에 대항하는 관청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불법현장을 단속하는 청경들에 의해서 사소한 불법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포클레인을 몰고 와서 두들겨 부수기도 하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했다.


이 시기 언론에서는 불법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며 관청과 우리 주민들 간의 대립상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경찰서에 불려 가 때로는 구속이 되기도 하고 수백 수천만 원씩 벌과금을 내면서도 마을 주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수도권에서도 발생하여 전국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농사만 지어서는 살기가 어려웠던 농민들에게 농지의 불법 용도변경에 대한 수요가 넘쳐나던 경기도의 하남 성남 남양주시 등 그야말로 위치가 받쳐주는 전국의 농지들은 대체적으로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농지법 건축법 개발제한구역법 등 엄혹한 법률의 탄압 속에서도 오히려 농민들의 저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십여 년 전부터 정부는 타협책을 제시하게 된다.

기왕의 불법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이행강제금을 유예하여 줄 테니 기한이 끝나는 대로 본래의 용도대로 원상 복구하기로 상호 합의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최소 육 년에서 최대 십 년 동안 불법이 합법화되었고 이행강제금의 부과 유예자 징수유예자란 명목으로 가가호호 만만치 않은 금액의 이행강제금을 면제받게 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봄날 같은 한시적 유예기간이 모두 끝나버렸다. 더 이상의 시한 연장은 없었고 기한 내 원상복구를 하지 않은 창고나 농지는 그동안 유예받은 이행강제금을 일시에 부과하겠다는 구청의 공문도 날아든 상태다.

대체적으로 고철상으로 임대를 주고 있던 농지들은 고분고분 자진하여 원상복구를 진행했지만 문제는 버섯공장이라고 불리는 불법 용도변경 창고들이다.

어쨌든 동식물사도 허가받은 합법적인 건축물이니만큼 건축물 관리대장까지 만들어진 상태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무려 육 년에서 십 년 동안 합법적인 준공장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에 법조문 속의 불법이라는 단어를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렸다.

합법은 아니지만 양성화된 공장으로서의 정당한 가격표까지 만들어진 마당이다. 그러니 막바지에 비싼 가격을 치르고 입주한 공장들로서는 건축물의 본래 목적인 농업 용도로 복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든 저렇든 간에 아직도 우리 마을은 활기가 넘친다. 농업과 공업이 뒤죽박죽 사이좋게 뒤섞여있는 우리 마을은 도로마다 농업용 트랙터와 공장 트럭들이 사이좋게 지나가고 중국집이며 밥집이며 배달 오토바이가 농장으로 공장으로 신나게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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