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갈아엎어야 하나 …
차가운 논두렁에 맥없이 주저앉은 농부가
잘 자란 상추밭 하우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불어터진 왼쪽 손마디 사이로는
애꿎은 담뱃갑이 몇 번이나 무참하게 짓뭉개지고
뱃속까지 빨려 들어간 담배연기가
농부의 탄식이 되어 허공을 가른다
하우스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모두 숨이 멎을 것 같다
상추의 영양분인 찰진 흙도
대롱대롱 매달려 목마른 상추를 적셔주는 이슬방울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추를 바라보며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다
오전에 다녀간 장사꾼이
하우스 한 동에 오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농부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도
역시 오만 원이라고
시월에 파종하여 한 달간 모종을 키우고
이식하여 석 달을 더 키운 상추 값이
고작 오만원이라니 …
가슴이야 아프지만 하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며 한시라도 빨리 후작물을 넣어려면 확 갈아엎을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농부가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상추들이 울먹이고 있었던 거다
농부는 하우스 한 귀퉁이에 숨겨두었던
막걸리를 연거푸 마시며
울화통이 터진 듯 눈가는 벌겋게 충혈되어 달아올랐다
상추들이 우는 이유를 농부는 아는 모양이다
농부의 분노를 상추는 아는 모양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고 있었다
농부의 발자국소리에 잠을 깨고
농부의 손길을 받으며 사랑을 느꼈고
속 비닐을 덮어주며 부지포까지 감싸준 뒤
밤새 잘 자라는 농부의 속삭임에 잠들 수 있었던 상추였다
넉 달 간을 함께 살며
이미 그들은 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농부님의 로타리 칼날에
자신의 몸이 짓 어개어지는 것은 그다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다만 애처로운 농부가 불쌍하여
상추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 불쌍한 것들을 내손으로 갈아엎을 수는 없어
저토록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눈물지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제서야 농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차가운 논두렁에서 일어났다
내손으로 직접 상추를 수확하여 새벽시장에 가지고 가지 뭐!
팔 수 있는데 까지는 팔고 팔리지 않으면 거져 주고 오는거야
어느덧 태양도 서산에 걸리고 농부의 환기창 닫는 손놀림이 바쁘다
오늘밤도 잘 자라는 농부의 속삭임에 흙도 이슬방울도 안심하면서
온종일 울어 눈이 퉁퉁 부어오른 상추와 함께 하는 이 마지막 밤에 곤히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