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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역설

by 맥도강

고지식한 성격 탓에 매년 삼월이면 이십 년째 같은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실시하면서 나름의 임종체험을 경험한다.

'약물 들어갑니다! 하나 둘 셋' 수면내시경의 모든 준비를 끝내고 간호사가 조용히 읊조리는 이 말을 끝으로 잠시 이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는 의식이다.

내가 인식하는 죽음의 상태란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아가 사라진 상태의 영속성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매년 경험하는 수면내시경의 경험은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물론 이런 상태가 영속적으로 진행된다면 큰일이겠지만 한 시간쯤 후면 멀쩡히 정신을 회복하면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체험을 할 수 있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갖은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스토리를 만들어왔고 실제로 그렇게 믿은듯하다.

그러나 138억 년 전의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현대과학은 죽음을 담백하게 정의한다.

'그것으로 끝, 영원한 종결 the end'

죽음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물리주의자로서 평소 궁금한 생각은 죽음을 대단히 복잡하게 생각할 것 같은 다른 분들의 진짜 속내가 어떨까 하는 것이다.

수천 년 전에 생겨난 동화 같은 이야기 즉, 죽음과 동시에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이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영원히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신념처럼 믿는 분들이 계신다.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그분들의 관점에서는 어쨌든 의심의 여지없는 확고한 신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이 보이지 않는 그 속내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궁금증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방정맞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계기로 한평생의 신념이 깨어지는 상황이 조성된다면, 그것도 죽음을 앞두고서 진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그 신념을 위하여 감수한 헌신의 량과 질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가령 인생의 전 과정을 맹목적으로 희생하였다면 그 허탈한 심정은 가히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서 들어가 보면 임종의 순간까지 철떡 같이 믿었던 자신의 신념이 죽음 이후에야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세상에 생존하는 타인의 생각이 아닌 죽음의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생각하려면 필연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상황에서의 영혼은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휴~ 하마터면 지옥불에 떨어질 뻔했잖아, 역시 내 평생의 믿음이 옳았어! 다행이야 다행!'

죽음의 당사자가 스스로 이 같은 말을 읊조릴 수 있으려면 비록 육신은 죽었을지라도 정신만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생존한다는 전제조건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제조건이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희망을 넘어서 과학적인 사실과도 부합하느냐이다.

아쉽게도 오늘날의 현대과학은 생전에 믿었던 신념의 진실여부를 죽음의 당사자로서는 확인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다고 보는 관점에 서있다.

따라서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과학적인 죽음의 정의는 '우주의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서도 '나'라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무한연속'이라는 담백하면서도 명료하게 정의된다.

자아가 깔끔하게 종결되고 없을진대 지옥불에 떨어졌다고 한들 생전의 삶을 아쉬워할 수도, 천국의 문을 열어젖혔다고 한들 천국에서의 삶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쾌재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운명하셨습니다'는 의사의 죽음선고와 동시에 죽음의 당사자로서는 우주삼라만상과의 모든 이해관계가 통째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르르 눈물이 흘러내릴 만큼 무척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차라리 깔끔한 종결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마음이 평안해지기도 한다.

적어도 죽음의 당사자 본인이 느끼는 과학적인 관점에서의 죽음은 세상과 저 세상을 통틀어서 이익과 손해를 따질 수 없는 한낱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로서 사라지는 자의 입장에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마치 수면내시경을 하는 동안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듯이 하루아침에 지구전체가 통째 사라졌다고 한들 인식의 주체가 사라진 자로서는 이 세상의 일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학적인 팩트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가만히 한번 상상해 보자.

같은 종교인들 간의 모임에서라면 모를까 평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모호한 주제를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주제는 가끔씩 나 혼자서만 고민하면서 판단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육신을 벗어난 영혼의 존재를 의심의 여지없이 철떡 같이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21세기를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대부분 애매매호한 양다리걸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보편타당한 생각 같다.

드러내놓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는 않지만 추정컨대 흑 아니면 백이라는 식의 100% 확신보다는 그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 지점을 옮겨 다니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터 잡은 형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안 죽어 봤으니 알 수 없잖아!'같은 불확실한 생각으로 은근슬쩍 죽음 이후의 세상에도 보험을 들고 싶어 하는 이중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 큰 변화가 찾아왔고 애매모호하게 왔다 갔다 하던 저울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목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정마다 보편적으로 지내던 제사의식의 변화.

예전에는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중요한 전통문화로 인식하였지만 요사이는 그 문화를 준수하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중세시대의 어리어리한 성당들이 즐비한 유럽이지만 지금은 단지 관광지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 실제로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은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평평하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의 관점에서 살아왔고 그 바탕에서 기록된 경전을 지금껏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빅뱅과 양자역학으로 우주의 온전한 실체에 대하여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는 21세기 과학의 시대에서는 비과학적인 전통적인 생각들이 점차 퇴색되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평생을 철떡 같이 믿고 따랐던 믿음의 실체가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면, 그것도 죽음을 앞두고서야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라는 질문에 답해보자.

일상적으로 만나는 우리 사회의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단해 볼 때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맹목적으로 배팅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이상으로 현명하게 판단하고 처신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주고 싶다.

'뭐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없더라도 나쁘지는 않아!'라는 식으로 심각하지 않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믿음행위의 결과보다는 믿음의 생활 과정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실용적인 생활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의 정의가 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생각처럼 '그것으로 끝, 영원한 종결'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설사 껍질을 깨고 나온 알맹이가 믿었던 백이 아니라 흑으로 밝혀졌더라도 거저 씨익 한번 웃고 말 일이지 그렇게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지구를 우주의 변방으로 밀어내버린 지동설과 원숭이와 사람의 조상이 동일하다는 진화론의 과학적인 사실들을 부정하면서 육신을 벗어난 혼령의 존재를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원론주의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천 년의 인류역사에서 가장 무겁고 심각하게 다루었던 주제조차도 일상생활 속에서 전혀 심각하지 않은 하나의 문화생활로 승화하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현명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과거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정안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자식들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기도의식을 웬만해서는 거르지 않았다.

기도의 결과가 매번 좋게 나타났을 리는 없겠지만 기도의 효험여부를 떠나서 오랜 세월 이러한 행위가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평안히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꽤 컸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혼령을 부정하는 21세기의 가치관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종교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정신적인 풍미가 느껴진다.

이것은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을 정갈히 하면서 편안하게 하는 기도의 과정 속에 내포된 깊은 의미 때문일 것이다.

허망한 명분보다는 구체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이웃과 공유하는 종교생활을 통하여 다져지는 인적네트워크의 중요성 또한 무시 못할 프리미엄이라고 할만하다.

이렇듯 부수적인 이익이 만만치 않은 종교생활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담 없는 문화생활로 정착된 느낌인데 대단히 심각할 수 있는 문제를 전혀 심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현명함이라고 할까?

현실적인 생활에서는 대부분 과학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지만 보다 행복된 삶을 위한 방편으로서 과학을 벗어난 신앙생활을 겸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신의 존재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아닐 수 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역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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